[12년ㅣ8월ㅣ유노무사의 상담일지]

일터기사



노무법인 필 노무사 유 상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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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에서 진귀한 경험을 하였다. 질판위에서 심의가 있을 경우 당사자와 대리인은 구술심리를 신청하여 진술할 기회가 주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의장이 “전체적인 내용은 서면으로 확인했으니 요지만 간략하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내가 “쏼라쏼라” 하고 말하고, 다시 의장이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진술을 참고하여 심의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라 말하며 진술을 마친다.
형식적인 측면도 있지만 구술심리를 통해 사건을 집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의가 있으면 구술심리를 매번 신청하고 있고 시간은 대부분 5~10분 내외다. 그런데 가끔 질판위원 중에 사건에 관심을 보이며 사실관계, 경위 등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사건의 쟁점을 부각시킨다는 측면에서 질문을 많이 받거나 위원들이 집중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사안이 있는 경우 좋은 예감을 가지고 질판위를 나서는 때도 있다.
2012년 3월 12일, 공황장애로 고통 받던 도시철도 이재민 기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에 대한 질판위 심의가 있었고, 대리인으로서 구술심리를 요청하여 심의에 참가 하였다. 노동조합에서 집회와 질판위 위원장 면담을 사전에 진행했고, 나의 몫은 질판위에서 진행되는 구술심리를 담당하는 것이다. 이 날, 무려 40여분에 걸쳐 각종 질의가 쏟아졌다.
질문의 요지는 “왜 사망 전 공사 측에 제출된 진단서에는 ‘공황장애’ 상병명이 없는데 재해자가 사망한 이후 발급받은 진단서에는 ‘공황장애’ 상병명이 있느냐?”, “진단서에는 ‘기음양허증’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공황장애’라고 판단할 수 있느냐?” 등 “과연 재해자가 ‘공황장애’에 따른 정신과적 질환의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재민기관사가 사망한 다음 날, 서울도시철도공사는 “공황장애 기관사 투신 관련 해명자료”를 배포하였다. 서울도시철도공사는 “사망 직원(이모 기관사)의 경우 전직 신청 또는 그 이전에도 ‘공황장애’의 진단서는 제출되지 않았음”이라고 주장했었다. 질판위 위원들이 나에게 물었던 것은 결국 “공황장애의 발병과 업무관련성에 대한 판단”에 도달하기 훨씬 이전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과연 이재민 기관사에게 “공황장애”라는 정신과적 질환이 있었는지 여부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40여분에 걸쳐 진행된 심의는 거의 경찰서에서 취조 받는 분위기라 할 정도로 살벌하였고, 질문지 또한 잘 준비되어 있었다.
재해경위서와 함께 제출한 수백 쪽에 달하는 증거자료들, 그 중 의학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의료기관의 의무기록에는 2011년 5월과 2012년 2월, 각종 정신과적 검사를 통해 ‘공황장애(우발적 발작성 불안)’을 확진했다는 것과 어지러움, 두통, 구토증상 등의 상병상태를 호소하며 “열차운전을 피하고 싶다”, “열차에서 내리고 싶다”, “다른 직종으로 전직하고 싶다”는 등 열차운전에 따른 직무스트레스를 호소했음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또한 공사 측 교번담당자 진술서에서도 2012년 2월 5일 면담 시 ‘공황장애 증상을 호소’하였던 내용이 담겨있다. 이러한 사실을 중심으로 40분 동안 위원들에게 관련 사실을 확인, 재확인 시켰다. 심의를 마치며 “본 사건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회의장을 나섰다. 그러나 이미 증거자료에서 확인된 사항을 되묻는다는 점에서 마음 한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들어앉았다.
결국 근로복지공단은 ‘부지급’처분을 하였다. “사망 사고 전 공황장애의 진단이 없으며 사후에 공황장애가 추가되어 공황장애로 인한 증상이 불명하여 불인정된다는 소견”이다. 분명 내 눈에는 2011년 5월과 2012년 2월의 각종 검사지와 의무기록지에 기재된 ‘공황장애’, ‘Panic disoder’가 보이는데 근로복지공단은 아니란다.
당연히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 지금 재심사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곧바로 소송을 진행할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사건은 분명히 노동부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재민 기관사의 사망 이후 기관사 업무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는 정신과적 질환자 5명을 전환배치를 통해 상병 치료를 받도록 조치하였고, 공사 내 ‘작업환경개선연구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서울시 교통본부 산하에 ‘최적근무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코레일의 경우 ‘휴먼에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기관사의 작업환경 개선 및 직무스트레스 완화를 위한 정책 및 개선, 대응책 마련을 위한 특별기구가 삽시간에 생겨난 것이다. 그만큼 이재민 기관사의 죽음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크다. 기관사 직무스트레스는 한 개인의 건강상 문제이며 동시에 대중교통 수단인 지하철을 놓고 볼 때, 대형 사고에 대한 위험을 최소화해야 할 필요성을 사회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삽시간에 이루어진 조치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이재민 기관사의 사망은 열차운전에 따른 직무스트레스, 이로 인한 공황장애의 발병, 그리고 사망의 인과관계에 있어 업무와의 관련성이 상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정작 이러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당사자의 죽음은 근로복지공단에 의해 ‘사망은 했으나 그 원인은 알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급기야 ‘공황장애’라는 상병명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요 며칠 재심사청구서를 작성하면서 가급적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선로로 들어오는 열차를 바라보면 슬피 우는 눈이 자꾸 보이기 때문이다. 사건에 몰입하다보면 객관성을 잃을 수 있기에 가끔씩 함께 일하는 노무사들에게 법리적 판단을 되묻고 재확인하면서 서면을 작성하고 있다. 분명 언젠가는 “우리 말이 맞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것이다. 부디 이러한 법적 판단이 재심사 과정에서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그러면 나도 편하게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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