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1월|기획] 죽음을 부르는 조선소(下)

일터기사


<3> 죽음을 부르는 조선소(下)‘빽’없는 윤식이들은 ‘찍’소리 못하고 죽었다

집필노동자 희정

윤식의 이야기
아는 형님이 하도 성화라 오긴 왔다만 윤식은 자리가 영 불편하다. 번번이 거절하기도 뭣해 이번 한번만이라는 다짐을 받고 따라나선 참이다. 낯익은 이가 없다. 업체가 다르니 얼굴 볼 일이 없다. 윤식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조차 불편하다. 노동조합을 어찌 생각하냐, 그런 질문이 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재수 없어 회사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윤식은 울컥 짜증이 치민다. 그런 윤식을 보다 못한 형님이 달래듯 말을 건다.

“재미없나?”
“재미있고 없고 할 게 뭐 있습니까.”
형님이라고 해도, 작은 아버지 뻘인 사람에게 윤식은 퉁을 놓고 만다.
“윤식이 너는 그럼 뭐할 거냐?”
뻔히 알면서도 번번이 저리 묻는 형님이다.
“기다려야죠.”
“뽑힐 거 같나?”
“발표 얼마 안 남았어요.”
“그게 되겠냐.”
“버티다 보면 되겠죠.”
조선소 훈련소를 졸업하고 2년이 지났다. 협력업체에서 1년 이상 일해야 정규직원이 될 기회를 가질 수 있다하여, 윤식은 하청 직원으로 2년을 살았다. 정규직원 채용 발표가 얼마 안 남았다. 그러니까 여기는 잠깐 있다 가는 곳이다.
기자라며 외떨어져 있던 여자가 대화를 듣더니 다가와 묻는다.
“훈련소를 거친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형님이 답한다.
“일 년에 한 번 뽑고 이런 게 아니에요. 분야별로 일 년에 서너 번은 뽑는데 한 기수 당 300명 정도 배출되지, 아마?”
“그 계산이면 한 해 졸업생만 1000명이 넘네요.”
“문제는, 정규직을 한 200명 채용한다 할 때, 그 1000명 중 200명이 정규직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건데. 올해 훈련소 졸업한 사람들이 있고, 작년에 졸업하고도 정규직 못 된 사람들이 재수를 해서 기다리고, 재작년 사람들이 삼수를 해서 기다리고… 그게 되겠냐?”
마지막 말은 윤식을 향해서다. 기자가 거든다.
“정말 바늘구멍이네요.”
윤식은 생각한다. 저 기자라는 여자, 재수 없다.

“버티면 될 겁니다”
하청 노조 모임 자리에서 젊은 노동자를 보았다. 유독 말수가 적어 눈에 띄었다. 아니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해 눈이 갔다. 그는 조선소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소를 졸업하고 하청업체에서 몇 년째 일하는 중이라 했다.
대형조선소들은 저마다의 직업훈련소를 갖추고 있다. 이곳 훈련소는 3개월가량의 실습이 끝나면 졸업생들을 각 하청업체로 배치한다. 하청업체에 1년 이상 머무는 것이 정규직 지원의 암묵적인 조건이다. 젊은 노동자는 정규직 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다. 선배들이 헛된 꿈이라 지적해도, 그는 한마디 말로 정리했다.
‘버티면 될 겁니다.’

윤식 이야기 2
조선소 도장공이 꿈이었던 것은 아니다. 윤식은 대형 조선소 옆에서 자랐다. 원청이든 하청이든 가족에 친척에 하다못해 친구 아버지라도 조선소에 다니는 지역이다. 학교를 마치고 윤식은 작은 부품회사에도 있어 보고, 에어컨도 고쳐보았다. 그러다 하청에서 일하던 사촌 형이 정규직으로 채용됐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조선소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
훈련소 동기들은 수군거렸다. 이곳에서 1등을 해도 정규직으로 뽑히는 놈은 따로 있다고. ‘빽’이 중요하다는 게였다. 그런 동기들에게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핀잔을 줘도, 윤식 또한 가진 것 없는 처지가 서러웠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하청업체로 간 날, 현장 견학이라며 봉지 하나 주더니 쓰레기를 줍게 했다. 하루가 이렇게 끝나나 했는데, 일손이 모자랐는지 배 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그곳에 사람 하나가 페인트 통을 긴 막대로 휘젓고 있었다. 제법 나이가 든 남자였다. 남자가 페인트통에 호스를 집어넣자 페인트가 꿀럭 소리를 내며 호스를 따라 선박 내부로 내려갔다. 윤식을 본 남자는 “왔냐?” 하고는 “저기 빨간 페인트 좀 갖고 와라” 했다. 이름 정도는 물어볼 줄 알았던 윤식은 얼떨결에 남자와 좀 떨어진 곳에 쌓인 페인트 통 하나를 들었다. 무게가 대단했다.
그것을 열댓 번 옮기고 나니, 이번에는 남자가 막대기를 윤식에게 건넸다. 또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남자는 신나와 약품 몇 개를 페인트 통에 붓더니 섞으라 했다. 뭘 어찌 할지 모르니 막대를 위아래로 휘저었다. 첨벙첨벙 소리만 요란하고, 페인트는 막대를 따라 마구 튀어 온몸에 달라붙었다. “아예 쏟아버려라. 버려.” 남자는 핀잔이나 놓았다. 그 사람이 바로 윤식이 형님이라 부르는 김씨였다. 첫날 윤식을 그리 골리더니 그 뒤로는 제법 다정히 굴어주었다. 알고 보면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일하며 제일 싫은 듣기 말은 ‘윤식이’였다. 윤식아 이것 좀 옮겨라. 윤식아 니가 갖다 와라. 윤식은 업체 막내였다. 특히 선실 내부 작업을 할 때, 배 위 선풍기가 꺼져있나 보고 오라는 말이 그렇게 싫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페인트 작업을 하다보면 가스가 찼다. 그래서 환기를 위해 선박 위에서 커다란 선풍기를 틀어 비닐호스를 통해 아래로 바람을 넣어줬다. 그런데 비가 오면 감전위험이 있다며 안전요원들이 선풍기를 껐다. 아래서는 것도 모르고 일을 했다. 한참 일 하다보면 머리가 아프고 눈이 따가웠다. 그럼 사람들이 윤식아, 하고 불렀다. 올라가 보라는 이야기다.
배 하나의 높이가 건물 서너 층. 그곳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10분이 넘게 걸렸다. 윤식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홀 위로 머리만 내놓고 “형, 선풍기 좀 켜줘요. 우리 아주 질식할 뻔 했어!” 빽 소리를 지르고 내려가면, 작업장 형이 따라 내지른 소리가 홀 안에 울려왔다. “내가 껐나. 끄고 가는 걸 어쩌냐.”
다들 그러고 일했다. 이래야 하는구나. 힘들지만, 이래야 하는구나. 윤식도 그렇게 일했다. 그러다 물탱크 작업 중 떨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적어도 2층 높이였다. 미끄러져 등부터 바닥에 부딪혔으니, 충격이 대단했다. 아이고, 죽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는데 오른손에 페인트와 붓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그 순간 드는 안도감이란. 페인트를 쏟았으면 자신과 동료들은 작업을 다시 해야 했다.
조장이 와서 “거 조심 좀 하지. 괜찮나?” 한마디 했다. 윤식은 대꾸 없이 자신이 일하던 곳을 올려다봤다. 발 하나가 다 들어가지도 않는 너비의 좁은 널빤지에 두 발 놓고, 한 손에는 페인트 붓을 한 손은 다른 널빤지를 붙들고 하는 작업. 그렇게 조심 일하길 바라면 족장을 쳐주던가. 윤식은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반장이 등을 쓱 보더니 파스 며칠 붙이고 쉬면되겠네, 했을 때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입을 여는 것은 정규직 입사에 도움 되지 않았다. 공상(근무 중 재해에 대해 산재 신청을 하지 않고 회사에서 치료비를 주는 것) 이틀 받고 끝냈다.
“산재는 회사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

“버티면 되겠죠.”
진취적으로 보이는 이 말이 실은 젊은 노동자들의 손과 발을 묶는다. 하청 인생들을 두고 하이리스크 로우리턴(위험이 크지만 보상은 적다)이라 한다지만, 조선소의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정규직원으로 채용될 기회의 하이리스크로 여겨진다.
정규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정규직 도장공으로 일하는 이를 만났다. 서른이 갓 넘은 그는 허리가 불편하다고 했다. 일이 몰려 무리를 했더니 디스크가 온 것이다. 산재처리를 하겠다하자, 회사는 그게 왜 일 때문이냐고 했다. 결국 몇 달 물리치료 받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사고가 나지 않는 한 동료들도 다들 그런 식으로 처리한다 했다. “아무래도 산재는 회사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을 하니까요.”
아픈 허리를 염두에 두어, 그에게 일을 하며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집에 가 갓난아이를 안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보호구를 아무리 착용한다고 해도 틈 사이로 다 들어와요. 손이라든지 얼굴에 다 묻고. 비닐장갑 끼고 그 위에 장갑을 껴도 입자가 미세하다보니 벗으면 손톱이라든지 이런데 다 끼고. 집에 가면 아무리 씻어도, 아이를 쉽게 만지지 못하죠.”
그 또한 하청을 전전하다, 운 좋게 정규직 채용이 되었다. “아무래도 임금은 이곳이 제일 만족할 만하니까.” 그가 버티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윤식이 그토록 되고 싶어 했던 정규직은 이런 모습일 것이다.

윤식 이야기 3
회사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김씨 형님이 안 보였다. 작업 중 파이프에 몸이 끼여, 빠져나가려다 어깨를 다쳤다고 한다. 회사에서 2주 공상을 줬다. 회전근개 파열이라고 진단하며 의사는 물었다. “어쩌다 그랬습니까?” 형님은 말했다. “자전거를 타다 그랬습니다.” 근무시간에 작업복 떡하니 입고와 하는 말을 담당의사는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형님이 2주가 지나도 일을 나오지 않았다. 통증이 여전하다고 했다. 업체는 복귀하지 않으면 무급처리를 하겠다고 했다. 결국 형님은 회사에 나왔다. 일주일 후, 어깨가 다시 탈이 났다. 수술까지 해야 했다. 형님은 산재처리를 하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억지로 불러다 일을 시켜 악화된 것이니 억울해서라도 산재 신청을 하겠다는 게였다.
형님은 산재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해고됐다. 그때부터 형님은 노동조합을 찾았다. 노동조합을 통해 산재요양기간 중 해고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고 취소도 받아냈다. 그러나 회사는 출입증을 내주지 않고 있다.

조선소 김씨는 그라인더 철 조각이 눈에 박혀도
한 하청노동자가 내게 물었다. “울산에 정형외과가 몇 개인지 알아요?” 울산 동구에만 정형외과가 서른 개 남짓이란다. 구(區) 단위로는 한국 최대 수이다. 유독 다치는 이가 특정 지역에 많은 것도 신기한데, 한낮에 작업복을 입은 채 병원에 찾아와 환자들은 다친 까닭을 이리 말한단다. 자전거 타다 넘어져서요, 길가다 부딪쳐서요.
“어떤 사람은 눈에 철심이 박혔는데, 그라인더 철 조각이 튄 거예요. 달궈진 철이니까 그게 각막을 태워 달라붙어요. 이걸 철심이 박혔다, 얘길 하는 건데. 잘못하면 실명 될 수도 있는 건데. 눈에 철이 박혀가지고도 여기 노동자들은 병원 가서 자기가 자전거 타고 가다가 그리 됐다고 얘길 해요.”
의사들은 모를 리 없지만 모른 척 하고, 노동자들은 절대 일하다 다친 것이 아니라 박박 우긴다. 언론이 귀족이라 부르길 마다 않는 정규직 노동자들마저 그러하다. 호봉, 승진, 자리 보존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직접적인 것은 반장 눈치 때문이다.
“옛날엔 팀장이 갖고 있었던 권한이 지금은 반장에게로까지 넘어왔어요. 민주노조 만들고 노동조합이 잘 나갔을 때는 노동자들이 직접 반장을 선출했거든요. 그런데 이를 역전시키기 위해 회사가 반장한테 권한을 주기 시작한 거예요. 노동자들이 가진 힘이 많이 약화된 것이
있고. 반장한테 밉보이면 자기 삶의 절반 이상을 보내야 되는 공장 생활이 힘들어지는 거죠. 산재문제는 특히 더 그렇고.”
밉보이면 고달파진다. 자기 인생의 절반을 보내는 회사다. 피곤해지고 싶지 않으면, 회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회사는 산재 문제를 싫어한다. 그 순간 산재는 단순 사고로 둔갑한다.
하청 또한 원청의 시달림을 받고 싶지 않다. 시달림 정도가 아니다. 맨아워(맨아워man-hour란 3년 이상의 숙련자가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작업분량으로, 원청과 협력업체는 이 맨아워를 가지고 단가계약을 한다) 같은 실질적인 비용 문제가 걸려 있다. 원청에도 ‘없는’ 산재를 낸 하청에게 누가 예쁘다고 맨아워 여유분을 주겠는가. 그래서 하청은 산재 신청을 하겠다는 노동자를 내쫓는다. 하청노동자들에게 산재는 더더욱 단순사고다.
둔갑술의 원인은 더 있다.
“산재로 접수되면 의료보험 혜택이 안 되니까 자기가 부담할 병원비용이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 의료보험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하는 거죠. 산재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 돈을 들여서 치료를 받을 수는 없는 거니까.”
산재보험은 신청 후 보상제도이기에, 치료비는 우선 개인 부담이다. 이를 흔쾌히 부담할 개인은 없다. 나날이 떨어지는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인정율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긴다.
“의료보험, 연금보험은 만날 적자라고 그러잖아요. 고갈된다고. 그런데 국가가 관리하는 보험 중 산재보험만 흑자예요.”
작년 근로복지공단은 1조 원가량의 흑자를 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산재율 자랑한다는 이 나라에서.
우스운 이야기로, 조선소 지역에서 산업재해를 밝혀내는 유일한 국가 기관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라고 한다. 산업재해를 당해놓고도 산재보험이 아닌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이들이 많아, 의료보험 적자에 시달리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이런 환자들을 찾아 산재 신청을 하도록 하는 작업을 종종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러니는 산재를 은폐하는 기업과 이를 방조하는 국가 때문이다.

윤식 이야기 4
김씨 형님은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윤식을 못살게 굴었다. 자꾸 모임에 같이 가자고 했다. 결국 끌려온 윤식이었다. 술자리가 끝날 즈음, 누군가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자고 제안했다. 나이든 노동자가 일어섰다. 윤식처럼 노동조합 모임에 처음 온 사람이다.
“제가 솔직하자면, 나이도 있는데 자식들은 다 크지도 않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못 하겠습니다.”
형님과 몇이 괜찮다 괜찮다, 한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지, 괜찮다. 맞은편에 있던 젊은 노동자가 벌떡 일어난다. 윤식 또래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예요. 좀 바꿔보자고요. 이제 좀 그러자고요!”
그가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 없이 사라진다. 밤도 깊지 않았는데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내일도 일을 가야 한다.
다음날 작업 중 사고가 있었다. 한 달에 두세 명 꼴로 죽어간다는 조선소에서 일어날 법한 사고였다. 사망자가 있었다. 그 명단에 윤식이 포함되었다.
회사는 윤식이 죽은 장소에 최대한 작고 좁은 가드레일을 쳐서 현장보존이라 했을 것이다. 그것마저 완공일이 촉박하다며 노동부를 압박해 서둘러 치워버렸을 것이다. 사고현장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업체 직원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작업을 했을 것이다. 윤식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한 원청회사는 윤식과 어떤 관련도 없기에 여전히 무재해 사업장이자 자율안전관리 기업이다.
‘조선소 협력업체 직원 사망’ 몇 줄짜리 기사로 나갔을지도 모르는 윤식의 죽음은 아마 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2011년
12월 16일. 현대 삼호중공업 하청업체 직원 장모(57) 씨 핸드레일 설치 중 사망.
12월 16일. 현대삼호중공업 하청노동자 추락사.
12월 30일. 세진중공업 밀폐탱크 가스 폭발사고로 하청업체 직원 김모(52) 씨 등 4명 사망.

2012년
2월 2일. STX중공업 하청업체 직원 최모(50) 씨 과로사.
2월 6일. 현대삼호중공업 하청업체 직원 장모(31) 씨 철문에 협착되어 사망.
2월 10일. 현대삼호중공업 하청업체 직원 이모(37) 씨 가스 용접 업무 중 호흡곤란으로 사망.
2월 24일. 현대삼호중공업 배관설치 업무를 맡은 하청업체 직원 전모(30) 씨 지게차에 치여 사망.
3월 22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협력업체 직원 이모(42) 씨 추락 사망.
3월 31일. 경남 창원소재 조선소 도크장에서 협력업체 직원 E/V와 앵글 사이 목이 협착되어 사망.
5월 30일.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H도크에서 하청업체 직원 강모 씨 질식사.
7월 6일. 현대중공업 엔진단조공장 자동절단 작업장, 하청업체 직원 최모(27) 씨 크레인 충돌로 사망.
8월 10일. 부산 모 조선소 선박갑판 제작 작업 중 철판이 넘어지며 하청업체 직원 홍모(56) 씨 사망.
9월 17일.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부 하청노동자 황모(48) 씨 탈의실에서 쓰려진 후 사망.
10월 16일. 해남 D조선소 대형선박 건조 중 30대 취부공 노동자 추락 사망.
10월 31일. 대불산단 조선소 폭발 사고로 2명 사망, 9명 중상.
(지난 1년 간 조선소에서 일어난 사망사고)

앞서의 이야기는 윤식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최모 씨, 김모 씨, 황모 씨…의 이야기이다.
늘 누군가 다치고 죽는 조선소. 죽은 이들의 가족은 많으나, 연락이 되는 유가족은 극히 드물었다. 정규직마저 인터뷰를 꺼렸다. 반장 눈치가 보여 못하겠다는 거절이 돌아왔다. 그러니 하청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몸에 묻은 페인트 때문에 아이 안기가 꺼려진다는 젊은 정규직 노동자, 동료가 산재를 당했다고 울던 하청 노동자, 올해도 정규직 채용을 기다리는 젊은 노동자, 공상처리만 3번째라는 늙은 노동자를 만났다. 윤식의 이야기는 이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죽은 이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여긴다.

다른 이야기
조선소 안을 돌다, 유독 불꽃이 강한 곳이 있기에 물었다.
“저건 뭐지요?”
“용접 기계에요. 저걸 끌고 다니며 용접을 자동으로 하게 하는 거지요.”
“기계니까 저건 좀 편하겠네요.”
정규직에게만 주어진다는 용접 기계였다. 노동조합 사람은 고개를 젓는다.
“용접공들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기계를 왜?
“저게 무게가 대단한데, 기계 3대를 한 사람이 봐요. 3대를 번갈아 가며 끌고 다니면 어깨 다 나가죠. 정신도 없고.”
기계 한 대당 사람 하나면 그럴 일이 없을 텐데. 속으로 생각하고 만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진 않는다. 어디 감히 조선소 작업장에 그것을 바랄까. 진동 방지 장갑이 주어지지 않아 평생 그라인더 기계 진동을 감당한 손이 이제는 가만있어도 바들바들 떨리는 늙은 노동자들이 판을 치고, 일 년에 동료 서른 명씩 죽어가는 걸 보는 하청노동자가 좀 바꿔 보자고요, 라고 외치는 그런 곳에서.
이곳은 20대 청년도, 어린 아이의 부모도, 늙은 노동자도 죽어가는 조선소다.

지난달 31일 대불산단 조선소 폭발사고로 돌아가신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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