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2월] 교원평가, ‘속설’과 ‘진실’-2

일터기사

[칼럼]

교원평가, ‘속설’과 ‘진실’-2

서울 공항고등학교 교사/전교조 조합원 송원재

교원평가에 관한 ‘속설’ – 1
“교원은 한 번 발령받으면 정년퇴임 때까지 평가를 받지 않는다.”

교원평가 문제가 불거지자 보수언론은 교원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른 바 ‘철밥통론’을 들고 나왔다. 요지는 “교원들은 한 번 발령받으면 정년퇴임 때까지 한 번도 평가를 받지 않는 성역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보도는 일상적인 퇴출위협에 시달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순식간에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교사 때리기’가 전 사회적으로 유행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객관적 사실은 한 순간에 실종되었고, 오로지 교원에 대한 원색적인 분노만이 남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교원들은 매년 한 차례 씩 ‘근무평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평가의 모든 권한은 교장이 쥐고 있고, 평가의 기준과 결과는 일체 비밀에 부쳐진다. 평가내용도 수업이나 연구에 대한 것보다는 ‘동료와의 인화’니 ‘행정업무 처리능력’ 같은 교육 외적인 요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다보니 평가는 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춤을 추기 일쑤고, 교장에 대한 충성도가 그대로 점수에 반영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평가결과는 고스란히 인사에 반영되어 승진을 좌우하는 최대변수로 작용한다.

‘교원평가제 도입’은 이런 문제투성이 근무평정제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평가제도 하나를 더 도입하려는 것이다. 학교가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인 이상, 국민은 학교에서 교육활동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감시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교사라고 해서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나쁜 평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또 하나의 평가’를 도입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많다. 그런데 그것을 비판했다고 해서 “그럼 너희는 평가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기득권세력으로 몰아간다면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교원들은 어떤 평가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지금 시행 중인 ‘나쁜 평가제도’를 하루 빨리 고쳐 달라.”, “앞으로 도입될 평가제도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으니 대화와 토론을 통해 더 검토해 보자.”고 요구했을 뿐이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욕설부터 퍼붓고 ‘상종 못할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 것은 동네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다. 하물며 명색이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는 교육부가 할 짓이 못된다.

교원평가에 관한 ‘속설’ – 2
“교원을 평가하면 부적격 교원을 퇴출시킬 수 있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교원평가에 찬성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코흘리개를 처음 학교에 보내 놓고 가슴 졸이던 시절, 처음으로 당하는 은근한 촌지 요구는 학교에 대한 신뢰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어쩌다 아이가 얻어맞고 오거나 왕따라도 당하게 되면 성의 없는 선생들이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웠던가? 아이들이 학교에 인질로 잡혀 있으니 성질대로 뒤집어 놓을 수도 없고, 가슴 속에 묻어두자니 벙어리 냉가슴에 화병이 도질 지경이다. 가뜩이나 먹고살기도 어려운 판에 학원비 대느라 아내가 파출부 나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학교가 도대체 뭐하는 것인지 울화가 치민다. 이런 선생들을 혼을 내서 정신 번쩍 차리게 만들 수만 있다면, 교원평가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대찬성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교원평가는 이런 ‘부적격 교원’을 퇴출시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정부가 제시한 교원평가 안의 어디를 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정부도 최근 “교원평가는 부적격 교원대책과는 분리해서 별도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부적격 교원’ 문제는 정부가 교원평가 강행을 앞두고 학부모들의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활용’한 하나의 카드에 불과했던 셈이다. 정작 학부모들의 불만은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사실 ‘부적격 교원’을 퇴출시키는 데는 별도의 법이나 제도를 만들 필요가 없다. 현행법상으로도 부적격 교원 퇴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교사에 대한 관리 감독 책임을 지고 있는 교장, 교감이 교육청의 문책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눈감아주고 넘어가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시늉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알고 보면 교육관료의 보신주의가 부적격 교원을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또 정말로 파렴치한 ‘부적격 교원’은 나름대로 생존술을 터득하고 있어서 상급기관 유력자와 먹이사슬을 맺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이런 미꾸라지들은 워낙 오염된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구상 어느 오염지역에 갖다놔도 잘 적응할 것이다.

‘부적격 교원’을 교단에서 추방하려면 가정 먼저 교육관료의 보신주의부터 잡아야 한다. 부적격 교원을 비호하는 교장이나 교감, 교육관료들을 공범으로 규정하고 동일한 처벌을 해야 보이지 않는 먹이사슬, 추악한 야합의 카르텔을 끊을 수 있다. 그리고 피해를 당한 학생이나 학부모가 학교나 교육청이 아닌 제3의 기구에 신고하게 하거나, 학부모회와 학생회를 법적 기구로 격상시켜서 발언권을 높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교원평가를 실시한다고 해도 ‘부적격 교원’들은 ‘절대로’ 퇴출되지 않는다.

또 ‘부적격 교원’과 관련지어서 꼭 짚고 넘어갈 문제가 하나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교원평가제가 도입되면서 ‘부적격 교원’으로 낙인찍히는 교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거나 일장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등 군국주의 교육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교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부적격 교원’에 대한 대책이 자칫 잘못하면 정부의 잘못된 방침에 반대하는 비판적인 교사들을 걸러내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비판적인 지식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교수 재임용제’, ‘법관 재임용제’가 도입된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교원평가제나 부적격 교원대책이 시장주의 교육정책에 저항하는 교원을 걸러내는 장치로 이용될 소지가 매우 많다. 칼을 만드는 사람은 대장장이지만, 휘두르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자다.

교원평가에 관한 ‘속설’ – 3
“교원을 평가하면 공교육의 질이 높아진다.”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교육의 질’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아리송하다. 일반적으로 ‘교육의 질’이라고 할 때는 교육시설의 수준이나 교원의 확보비율, 국가의 교육재정 부담정도, 교육복지의 수준, 학생의 학업성취도 등을 종합적으로 의미한다. 반면 보수언론이 주로 이야기하는 ‘교육의 질’은 ‘입시성적’을 지칭하고, 학교에 대해 요구하는 것도 “학교를 입시학원처럼 만들어라.”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하는 공교육의 이념이 엄연히 살아있는데, 학교에 입시학원의 척도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교육의 질을 좌우하는 요소는 실로 다양하다. 우선 교육에 필요한 학교시설과 교육설비가 있어야 하고, 효율적인 교육행정과 교육정책이 교육활동을 뒷받침해야 하고, 학생의 학습동기를 자극하는 적절한 교육환경과 가정환경이 따라줘야 한다. 그리고 우수한 교원이 충분히 확보되고 교원과 학부모 간에 원활한 소통과 협력이 이뤄질 때 교육적 효과는 극대화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들을 그대로 놓아둔 채 교원들만 다그치면 과연 교육의 질이 저절로 높아질 것인가?

교원평가를 먼저 도입한 외국의 사례를 보면, 교원평가를 도입해서 교육의 질이 높아졌다는 결과는 어디에서도 보고된 바가 없다. 교원평가 결과를 보수와 인사에 연계시키는 영국의 경우, 교원들이 평가의 부담을 피해가기 위해 ‘성적 올려주기’, ‘시험문제 쉽게 출제하기’, ‘시험문제 미리 알려주기’, ‘공부 못하는 학생 결석시키기’ 등의 편법을 자주 사용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훈계나 상담이 필요한 ‘문제학생’이 있어도 갈등이 일어나면 평가점수를 낮게 받을까봐 상담을 기피하거나 생활지도를 사실상 포기하는 사례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교직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교원 지망자가 크게 줄고,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 제3국 출신자들이 교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등 부작용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 교육부의 방안대로 1년에 한두 차례 공개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 과연 공교육의 질이 높아질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열악한 교육환경의 수준을 대폭 개선하고,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이고 교원의 수를 늘려 교사와 학생의 인간적 접촉면을 늘리는 것이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는 더 효과적이다. 정부의 정책은 마치 기초 체력훈련은 소홀히 하면서 흥분제를 투여해서 무리하게 기록을 단축시키려는 운동선수 같다. 교원들이 교원평가에 대해 “교육실패의 책임을 교원들에게만 떠넘기려고 한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교원평가의 ‘진실’ – “교원 구조조정을 위한 신종 통제수단”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현 정부의 모든 정책의 밑바닥에는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가 짙게 배어 있다. 자본은 구조조정을 비롯한 무소불위의 노동통제 권력을 움켜쥐었고, 정부는 노동유연화 정책을 통해 그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국가가 담당하던 공공부문 역시 하나하나 사적 자본에 넘어가 전면적 경쟁원리에 맡겨지고, 이제 교육부문도 그 길을 밟아가고 있다.

정부는 ‘학교체제 다양화’라는 명목 아래 특목고 확대, 자립형사립고 확대, 1군 1명문고 육성, 교육개방에 따른 외국인학교 설립, 기업도시 특별법에 따른 기업학교 설립 등을 통해 종전의 평준화 교육을 사실상 포기했다. 빈부격차에 따른 학교의 서열화, 교육기회의 차등화는 이미 기정사실화 되었고, 정부에게는 그것을 시정하려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없다. ‘학교의 서열화’는 곧 ‘교원의 서열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교원평가는 그것을 위한 제도적 선별장치로 작동할 것이다.

‘우수한 학교’에 배치된 ‘우수한 교원’은 부유층의 교육기회 독점을 위해 봉사할 것이고, ‘실패한 학교’로 밀려난 ‘열등한 교원’은 일상적인 퇴출과 구조조정 압력에 시달리며 부당한 통제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협력과 소통을 본질로 삼는 교육활동은 뿌리째 흔들릴 것이고, 교원들은 ‘우수한 교원’이 되기 위한 소모적 경쟁에 내몰릴 것이다. 그나마 그 종착역은 ‘모든 학교의 균등한 발전’이 아니라, 상류층의 교육적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다수 국민의 교육권을 희생시키는 ‘공교육의 파탄’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교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교육 수요자’인 국민 개개인에게 전가하여 공교육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공교육은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경쟁을 통한 선발과 그에 따른 특권배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종국에는 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을 선점한 상류층의 교육기회 독점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교원평가는 그에 순응하는 교원과 저항하는 교원을 분리하여 차등화 하는 수단으로 작동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교육 체제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교원집단만을 양산할 것이다.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서 – 학부모의 교육권, 교육 참여

학생, 학부모는 원래 교사와 협력관계를 이뤄야 하는 교육의 한 주체이다. 그러나 역대 군사정권은 파시즘 교육에 대한 비판을 누르기 위해 전통적으로 ‘교육주체 배제전략’을 채택해 왔고, 학부모와 학생은 교사와 마찬가지로 교육에 대한 발언권을 허용 받지 못했다. 모든 권력은 국가기구에 의해 독점되었고, 교육주체의 자발적인 목소리는 철저히 금기시 되었다. 그런 점에서 문민정부 –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교육정책은 그 이전에 비해 결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교육 실패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교원에게로 떠넘겨 학부모와 학생의 불만을 교원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교육주체 상호 간의 불신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교육시장화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불신과 교육주체 간 대립을 적극 활용하려 하고 있다. 반면 진정한 교육자치의 핵심인 학생회-학부모회의 법제화, 교장 선출-보직제 실현, 사립학교법 개정 등 시급한 과제는 외면한 채, ‘단위학교 책임경영제’를 도입하여 교장과 국가의 권한만을 더욱 강화하려 하고 있다.

정말로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주체의 ‘잃어버린 권리’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부터 해야 한다.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훨씬 약한 나라들도 이미 실시하고 있는 완전무상 의무교육제도, 무료급식 등 교육복지에 대한 대폭적인 개선이 시급하다. 제3세계 국가도 못 따라가는 부끄러운 교육환경을 이대로 방치하고서는 우리 교육의 미래는 없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한 투자이며, 후세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이다.

교원평가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대립과 갈등은 교육주체 간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소모적 갈등관계로 치환하는 ‘왜곡된 논쟁’이며, 정부와 보수언론에 의해 치밀하게 조작된 ‘허구의 논쟁’이다. 그것을 부추기거나 그에 편승하는 모든 행위는 우리 교육의 발전을 위해 결코 득이 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적군’과 ‘아군’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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