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12월|문화읽기]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일터기사

자살과 죽음에 대한 단상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한노보연 소장 김정수

#1. 며칠 전 죽음에 대한, 정말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작년 유성기업 파업 당시, 공장에 고립된 상태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구사대로 동원돼 동료를 진압하다가 우울증을 겪어 지난 8월 산재 승인을 받은 한 노동자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일면식조차 없는 분이지만,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마음 한 구석의 씁쓸함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아마도 지난 2년간 그가 느꼈을 혼란, 죄책감, 배신감, 분노……. 그 고통이 수십 분의 일이나마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달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적 고통이 노사 간의 극단적인 갈등이라는 사회적 문제 때문이라고 공식인정을 받았으나, 결국 그의 심적 고통을 줄여주지는 못한 것이다.

#2. 엊그제 TV에서 강풀 원작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방송했다. 치매를 앓고 있던 할머니(김수미 분)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던 주차관리원 할아버지(송재호 분)가 할머니가 불치병(아마도 대장암쯤으로 여겨지는)에 걸리자 함께 자살하는 장면이 가장 슬펐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없는 삶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할머니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의 의미를 타인의 존재에서 찾는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할머니는 비록 치매에 불치병까지 있었지만 남은 삶에 대한 선택의 권리를 빼앗긴 것이다. 만약 할머니가 온전한 정신이셨다면 얼마 남지 않은 고통스러운 자신의 삶을 그닥 아까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할아버지의 삶을 포기한 것에 대해서는 무척 미안하고 슬퍼하셨을 것 같다. 나는 ‘나의 사랑’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미안하고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12월 9일자 나의 Facebook에서)

#3. 높은 자살률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이미 자살은 사회문제가 되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을 두고 있다는 얘기다. 나만 해도 친할아버지가 여든이 넘은 연세에 자살하셨고, 서른을 채우지 못하고 자살한 학창 시절 친한 친구와 후배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여전히 주요한 논제가 되지 못한다. 1년에 한번 통계청에서 사망통계를 발표할 때 주요 뉴스로 뜨긴 하지만 그때뿐이다. 간혹 10대의 자살이나 노인 자살이 교육 문제나 고령화 사회 문제와 더불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긴 하지만 대개는 교육 문제와 고령화 사회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가 되거나 설익은 대책에 관한 얘기들일 뿐 자살 자체가 논의의 핵심이 되지는 않는다. ‘죽음’ 자체를 금기시하는 문화 탓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삶’이란 단어로 검색을 하면 7,055권이 검색되고, ‘죽음’이라는 단어로는 1,658권, ‘자살’이라는 단어로는 379권의 책이 검색된다. 판매량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4. 왜 사람들은 자살을 할까? 자살에 관한 책이 몇 권 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쓴 [자살론, 에밀 뒤르켐, 황보종우 역, 청아출판사]은 자살에 관한 대표적인 고전으로 유명한 책이다. 초판(1897년)이 발행된 지 100년도 더 지났지만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는 내용이라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고 한다. 언젠가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으로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 토머스 조이너, 김재성 역, 황소자리]. 아버지를 자살로 잃은 심리학자가 쓴 자살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담은 책이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자살에 관한 21세기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책 역시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올라있다.

#5. 문학의숲 출판사에서 나온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문학의숲 편집부(엮은이)]은 상술의 냄새가 약간 나지만 추천한 책들의 면면을 보면 그 정도는 애교로 넘어갈 만하다. 소개된 50권의 책 중 다섯 권 정도는 이미 읽은 책이고, 다섯 권 정도는 읽다 말거나 소장하고 있는 책이고, 다섯 권 정도는 소개된 내용을 보고 최근에 사서 읽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이 바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이자 유대인으로 나치의 강제 수용소를 몸소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를 탐구하고 자신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이룩한 학자이다. 책 속에는 그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삶과 죽음을 수십 번 넘나드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 가득하다. 그는 경험을 통해 얻은 바가 무엇인지를 니체의 말을 빌려 한 문장으로 말한다.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6. 나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싫다.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긍정하는 문화의 이면에는 대다수의 인민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비참한 자신의 삶을 맹목적으로 인정하게끔 강제하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가장 널리 쓰이는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죽음을 예찬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죽음인 자살에 대해 안타까운 시선을 담아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가장 싫은 것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한다. 100원짜리 동전을 놓고 “난 뒷면은 싫으니 앞면만 가지겠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니라 ‘어떤’ 삶이고 ‘어떤’ 죽음이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많은 민초들처럼) ‘차라리 죽느니보다 못한 삶’이 있고 (부처나 예수처럼) ‘수 천 년을 살아있는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자살이 안타까운 건 죽음 자체보다는 자살에 이르게 된 과정의 슬픔, 즉 그 ‘어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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