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0월/되돌아보기]어느 산재 노동자의 죽음과, 패배했으나 승리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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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산재 노동자의 죽음과, 패배했으나 승리한 투쟁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준) 편집위원 신상도

지난 1999년 6월 22일, 그러니까 이미 4년이 지나버린 일이다. 한 젊은 노동자가 노동재해로 치료받던 중 제초제를 먹고 자살한 사건이 저 남쪽 땅 창원에서 일어났다. 이상관, 그는 경남 창원의 대우국민차에서 일하던 노동자로 1999년 2월 26Kg의 작업장비를 옮기다가 허리를 다쳐 산재 지정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소위 ‘요추염좌’라는 병명이었는데, 그의 통증은 허리에 국한되지 않고 다리로 뻗치면서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환자의 통증이 요추의 퇴행성 변화로 인해 발생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입원치료를 중단할 것을 종용하였고,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던 그는 결국 자살을 결심하였다.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힘들 것 같다. 몸이 아픈 고통이 너무 심하다.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다시는 나 같은 노동자가 없기를 바란다’는 그의 마지막 유언은 전체 노동안전보건 운동진영의 분노를 촉발하였고, 7월 29일부터 시작된 근로복지 공단 앞 농성은 해를 넘겨 흰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 지속되었다. 이 투쟁은 노동안전보건 운동사에서 최초로 2명이 구속될 정도로 격렬하였지만, 결국 운동진영의 패배로 종결되고 말았다. 자살에 대한 산재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전문가들의 지루한 공방이 지속되는 동안, 죽음으로 내몰린 현장 노동자의 삶과 현실은 투쟁으로 결집되지 못하였고, 산재요양제도의 문제점이 검토되고, 퇴행성 변화라는 의학적 소견에 대해 진위를 가리는 동안, 현장 노동자들의 참여와 분노는 다시 일상으로 잦아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투쟁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역사적인 반성과 고민이 현장에서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이상관 동지의 자살 대책 투쟁은 한국 노동보건운동의 분수령을 가르는 운동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투쟁의 과정에서 운동진영의 논쟁과 대립, 갈등은 그 어느 시기보다도 심각하게 분출되었다. 지난 10년 간 전문가들이 주도해 온 노동안전보건운동을 이제 현장의 노동자가 현장 중심의 시각에서 펼쳐야 한다는 반성과 고민이 집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전문가 진영과 격렬한 논쟁과 대립이 지속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어렵게 단일조직으로 결성된 지 1년 만에 전국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었던 산재추방운동연합이 해체되고, 현장 속에서 출발하고 현장을 바꾸어 나가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되었다.

이상관,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약한 현장 노동자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분노하여 투쟁하려 했던 현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안전보건의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는 주체로 변해갔다. 법과 제도를 바꾸면, 현장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장황한 논리에 대해, 이제는 현장 노동자들이 따끔하게 질책하고 비판할 줄 알게 되었다. 노동현장의 주체적 각성과 단결로 거듭난 노동자 건강권 투쟁의 기치는, 이상관 동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흘렸던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을 자양분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 대오는 오늘날 근골격계 직업병 대책 투쟁을 만들어가고 있다. 패배했으나 승리한 투쟁, 그것이 이상관 자살 대책 투쟁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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