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2021-11 발칙건강한 책방]

일터기사

‘하지만’이란 기대를 기대하며

-『긴긴밤』. 2021. 루리 저. 문학동네

천지선 회원, 변호사

 

저는 공감이란 말보단 이해란 말을 더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공감은 착각이거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공감을 간절히 바라고, 만약 공감이란 게 가능하다면 그건 일종의 작은 기적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노든은 어릴 때부터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도 코끼리인 줄 알았지만, 사실 노든은 코뿔소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코끼리처럼 코와 귀가 자라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노든에게 할머니 코끼리는 말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가 많으니까. 그게 순리야.”

이후 노든은 코끼리 고아원 밖으로 나와, 그 너머의 세상을 보고 배웁니다. 아내를 만나 딸도 생기고요. 행복도 잠시, 코끼리 뿔을 노리는 인간들로 인해 행복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가족을 잃은 노든은 인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지만, 그는 동물원에 갇힌 신세입니다.

치쿠와 윔보는 펭귄입니다. 치쿠는 오른쪽 눈이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윔보는 늘 치쿠의 오른편에 있으려 합니다. 어느 날, 치쿠와 윔보는 버려진 알을 발견하곤 그 알의 아버지가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번갈아 가며 알을 품던 중, 갑작스레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집니다. 치쿠는 아직 살아있던 윔보를 두고, 알을 챙겨 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같은 동물원에서 지냈던 적이 있는 노든과 치쿠는, 아마도 전쟁이었을 불덩이를 각자 피하다 우연히 만납니다.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 어쩐지 불운해 보이는 검은 점이 박힌 알. 이들은 다시 함께하며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동물원에서 보낸 치쿠에게 바다란 너무나 먼 도착지입니다. 결국 노든은 알을 부화시킬 것과 그 알에서 나온 이를 바다까지 데려다줄 것을 약속합니다.

알에서 부화한 펭귄과 노든, 이 둘은 함께 바다를 찾아갑니다. 수많은 긴긴밤도 함께 보냅니다. 긴긴밤 동안, 노든의 분노와 고통은 이름 없는 새끼 펭귄과 함께하며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둘은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되었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흰바위 코뿔소와 불운한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목숨을 빚지고 태어난 어린 펭귄이었지만, 우리는 긴긴밤을 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여정에서 다친 노든은 인간들에게 발견돼 치료받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새끼 펭귄은 노든을 두곤 떠나기를 거부합니다. 자신이 코뿔소가 돼, 그의 곁에 남겠다고 말하죠. 그러자 노든은 말합니다. 자신을 떠나서, 펭귄의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마침내 새끼 펭귄은 혼자서 바다에 도착합니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긴긴밤〉은 사랑과 연대, 다양성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 여기서 발견되는 모든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긴긴밤〉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연대를 말하기엔 사안마다 각자의 지향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다양성을 말하기엔 나와 너무나도 다른 당신이 힘들며,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말하기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보단 차악을 선택하면서 살아가지 않나요?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순간의 작은 기적이 있을 거란, 작은 기대조차 없다면 살 수 없는 나약하고 질척하며 미련 많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혹자에겐 조금은 뻔한 동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코끼리와 코뿔소, 펭귄의 이야기를 폄하하고 싶진 않습니다. 사실은 동물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전 여전히 수없이 많은 긴긴밤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라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소한의 선량함이라도 지키며, 그렇게 살아남고 싶습니다.

〈긴긴밤〉 덕분일까요. 옆에서 코 골며 잠든 사람이 유난히 애틋해 보이는 밤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이 유난히 그리워지는 밤이기도 하고요. 함께 같은 길을 걷자던 동지들도 유난히 생각납니다. 내일은 어색하고 새삼스러운 전화라도 걸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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