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2021-12&2022-1 알아보자, LAW동건강] 정수기 설치 담당 엔지니어들이 근로자성을 인정받기까지

일터기사

정수기 설치 담당 엔지니어들이 근로자성을 인정받기까지

임혜인 회원, 노무사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 인정 기준

산업안전보건법을 비롯한 노동관계법령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누군가를 근로자로 인정하는 데 있어 그 사람의 직업은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실무상 근로자성이 문제되는 사건에서는 그 사람이 하는 일보다 그 사람의 직업, 그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중요한 고려요소가 된다.

대게 근로자성의 인정, 불인정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소위 전통적인 노동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첨단에서 최첨단, 4차 산업혁명을 부르짖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노동의 모습은 여전히 제조업, 생산직 또는 일반 사무직 노동에 머물러있다. 이에 근무장소나 근로시간의 변동이 빈번하거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높은 자율을 가지고 있는 직업들은 의례 근로자성이 부인되어, 긴 싸움을 통해 스스로 근로자임을 세상에 증명해야 한다.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계약의 형식이 고용계약인지 도급계약인지보다 그 실질에 있어 근로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설시하며, 종속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지 여부는 다음의 표와 같은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대법원 2006.12.7. 선고 2004다29736 판결, 대법원 2017.1.25. 선고 2015다59146 판결 등 참조)

① 업무 내용을 사용자가 정하고 취업규칙 또는 복무(인사)규정 등의 적용을 받으며 업무 수행 과정에서 사용자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하는지

② 사용자가 근무시간과 근무장소를 지정하고 근로자가 이에 구속을 받는지

③ 노무제공자가 스스로 비품·원자재나 작업도구 등을 소유하거나 제3자를 고용하여 업무를 대행케 하는 등 독립하여 자신의 계산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지

④ 노무 제공을 통한 이윤의 창출과 손실의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는지

⑤ 보수의 성격이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지

⑥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하여졌는지 및 근로소득세의 원천징수 여부 등 보수에 관한 사항

⑦ 근로 제공 관계의 계속성과 사용자에 대한 전속성의 유무와 그 정도

⑧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법령에서 근로자로서 지위를 인정받는지 등의 경제적·사회적 여러 조건

※ 다만,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하여졌는지,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하였는지, 사회보장제도에 관하여 근로자로 인정받는지 등의 사정은 사용자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 그러한 점들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근로자성을 쉽게 부정하여서는 안 된다

지난 11월 11일은 지난 2016년부터 근로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오랜 분쟁을 치러온 청호나이스 엔지니어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을 확인하는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소 제기 후 약 5년 만에 얻은 값진 판결이다. 청호나이스 엔지니어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전 회사와 개별적으로, 노동청 진정을 통해 다툼을 이어온 시간까지 합친다면 이들이 근로자로 인정받기까지 투쟁한 시간은 더 오래일 것이다.

 

청호나이스 엔지니어, 1심은 근로자성을 부정

안타깝게도 1심은 이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엔지니어들이 ①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용역 업무를 수행한 것이고, ②회사로부터 모종의 서약서, 행동강령 등의 지침을 받아 업무를 수행하여온 사정은 있으나 그 지침 또한 내용이 추상적, 일반적 내용에 불과하여 구속력이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③자신에게 배당된 A/S 업무를 회사의 별도 승인 등 관여 없이 타 엔지니어에게 이관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점, ④엔지니어들이 회사 사무실로 출근하여 회의를 하기도 하였으나 회의 참석이 강제되는 것이 아니었고, 엔지니어들이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등의 사유로 엔지니어들이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한 근로자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하였다.

 

고등법원, 대법원을 통한 근로자성 인정

1심의 이러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엔지니어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였다. 엔지니어들이 주장한 사실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재판부는 엔지니어들의 노동과정, 내용 등을 섬세하게 살피며 그 속에서 종속성을 인정할 만한 요소를 찾아내며 그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시하고 있으며, 그 주요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업무내용의 결정

우선, 재판부는 엔지니어들이 체결한 용역계약의 실질을 검토하며, 업무내용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체화되었는지를 살핀다. 회사와 엔지니어 간 체결한 위탁계약서에는 원고들이 담당하게 되는 업무에 관하여 ‘각 원고는 피고의 상품의 배달·설치·A/S·판매계약의 체결을 주선한다’는 등으로 추상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정하고 있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용역계약서의 추상성이 회사의 업무지시로 실질적으로 구체화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2) 업무 수행 과정에의 지휘·감독

또한 재판부는 이 사건 회사가 영위하는 사업의 성격을 고려하였을 때 회사가 엔지니어들에게 상당한 지휘·감독을 할 만 한 유인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청호나이스는 정수기, 공기청정기, 비데 등의 제조·판매·렌탈 업무를 하는 회사로 제품의 정확한 설치 및 지속적인 관리와 A/S가 필수적이며, 이러한 서비스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계속적인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엔지니어들의 기술력과 서비스 역량은 피고의 브랜드 이미지와 사업의 성패에 직결되는 것이기에 청호나이스가 엔지니어들에게 상당한 지휘·감독을 행사할만한 입장에 놓여있다는 객관적 현실을 인정하며, 청호나이스가 엔지니어들을 상대로 행한 일련의 지휘·감독의 실태는 사용종속관계를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시하였다.

3) 취업규칙 및 복무(인사)규정 등

1심에서 내용이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그 구속성이 부인된 회사의 다양한 형식의 규정, 지침 등 또한 취업규칙 등에 해당함을 확인하였다. 회사가 엔지니어에게 제시한 행동강령 등 각종 지침은 엔지니어들에게 통일적으로 적용되는 모종의 규율이었으며, 가령 물품지급규정, 벌과 등에 관한 기준, 서비스강화를 위한 엔지니어 용모와 복장 규정, CS 부진 엔지니어 교육 규정 등에 해당하는 부분은 사실상 엔지니어들의 근로조건 내지 복무규율에 관하여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용자가 정하는 취업규칙 내지 복무규정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4) 근로 제공 관계의 계속성과 전속성

엔지니어들이 회사로부터 받은 수수료를 주된 수입으로 삼은 점, 통상적으로 아침에 사무소에 출근함으로써 업무를 시작하였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피고의 업무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엔지니어로서의 업무 외에 다른 사업을 하거나 다른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점, 위탁계약을 체결한 기간 동안 회사로부터 받은 수수료 외에 다른 소득을 얻지 않은 점 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근로 제공 관계의 계속성과 전속성이 인정된다고 보았다.

5) 독립사업자성

소비자들의 일반적인 인식 역시 엔지니어들의 근로자성이 인정되는데 기여하였다. 재판부는 소비자들은 시장에서 엔지니어들이 제공하는 설치·A/S 서비스를 청호나이스로부터 받는 것으로 당연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이들의 근로자성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요인으로 평가되었다.

누군가의 근로자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지 그가 노동관계법령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주체임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일터에서의 그의 존재와 그의 노동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이다. 노동의 형태가 다변화하는 사회에서 각자의 노동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보다 포용력 있는 노동환경의 조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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