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022-1 직환의가 만난 노동자 건강이야기] 노동자 인지 장애까지 불러온 전자산업 유기용제 노출

일터기사

노동자 인지 장애까지 불러온 전자산업 유기용제 노출

이세미 회원, 이화여대병원 직업환경의학 전공의

 

파킨슨병은 신경이 퇴행하여 발생하고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떨림이나 동작이 느려지는 등의 운동장애 증상을 나타내고, 주로 노인에서 흔하게 발병한다. 치료를 통해 증상을 조절하고 진행을 늦출 수는 있지만 다른 신경퇴행성 질환과 마찬가지로 완쾌할 수는 없는 병이다.

작년 가을, 파킨슨병을 진단받은 세 명의 노동자를 만났다. 파킨슨병이 직업과 관련되었는가에 대한 상담과 평가를 위해 진료실에 찾아온 것이다. 모두 전자 산업에 종사하였다는 점과 높은 농도의 유기용제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그리고 파킨슨병 산재 요양 신청에서 불승인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유기용제는 다른 물질을 녹일 수 있는 액체로 휘발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며, 세척제나 희석제로 산업 현장에서 널리 사용된다. 전자 산업에 종사하면서 유기용제에 노출된 것이 파킨슨병 발병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생각에 담당 교수님의 지도하에 면담을 진행하고 기록, 문헌 검토를 통해 의견서를 작성했다.

 

사라진 과거 기록과 기억

첫 번째로 만난 이는 한 반도체 공장에서 11년간 일한 여성 노동자였다. 그는 사내 하청 업체 소속이었기 때문에 11년간 5개의 회사에 속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4년간 근무한 회사의 작업환경에 관해서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2005년부터 2012년까지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역학조사도 마찬가지로, 최근 4년간의 환경에 대해서만 보고했다.

사라진 것은 기록만이 아니었다. 파킨슨병은 신경퇴행성 질환으로 인지기능 장애를 수반한다. 파킨슨병으로 투병한 지 수년이 지난 그는 옛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워했고, 대화를 빠르게 이어나가는 것도 힘겨워했다. 기나긴 면담 끝에 시기별로 근무했던 회사와 작업 내용, 작업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12년 이전의 작업환경은 그 이후보다 열악했던 것으로 보였다. 더 좁은 공간에서 납땜하는 다른 부서와 함께 근무하기도 했고, 자동화 설비도, 에어컨도 없어 반도체 칩에 묻은 분진을 입으로 불어가며 일했다는 것이다.

“(반도체) 칩이 도착하면 검은 가루가 잔뜩 묻어있었어요. 칩을 코앞까지 가져와 입으로 후후 불어냈어요. 자주 재채기가 나고 가루가 눈이며 옷 안에까지 들어갔어요. 가루를 불어내고도 이물질이 묻어있는 게 보이면 세척제로 닦아냈죠. 작업대가 가루로 더러워지면 그것도 직접 닦아냈어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하나는 역학조사에서 2012년 이후의 작업환경만 평가하고 그 이전의 근무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알코올계 유기용제가 파킨슨병을 유발한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라는 산재 불승인 사유가 부적절하다는 점이었다. 해당 노동자가 사용한 물질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아이소프로필알코올이었고, 아이소프로필알코올과 파킨슨병의 관련성이 역학 연구를 통해 보고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특정 유기용제와 파킨슨병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는 주로 트리클로로에틸렌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역학 연구에서는 ‘유기용제 노출’과 파킨슨병의 연관성에 관해서 확인했고, 그것이 알코올계인지 염소계인지 세부적인 종류는 구분하지 않았다.

왜 여러 종류의 유기용제 중 연관성이 따로 보고된 물질이 트리클로로에틸렌 뿐이었을까? 트리클로로에틸렌이 그 시기에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트리클로로에틸렌은 지금은 신장암을 유발하는 발암물질로 알려졌지만 1980년대까지도 마취제로 쓰이기도 했고, 인체에 미치는 독성도 제한적으로 보고되었다. 특정 화학물질의 건강 영향에 대한 역학 연구는, 해당 물질이 널리 사용되며 사례가 쌓인 뒤에 진행될 수 있기에, 비교적 최근에 사용하게 된 물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적다. 새로운 화학물질은 산업 현장에 지속적으로 도입되고 있을뿐더러, 현재 산업 현장에서 쓰이는 6만 여종의 화학물질 중 우리가 독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물질도 많지 않다. 이전에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적고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진 화학물질이 나중에 직업병을 유발하고 나서야 위험성이 알려지는 경우도 잦다. 각각의 화학물질에 환원적으로 접근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되지 않을까.

 

유해 유기용제에 노출된 노동자들

두 번째로 만난 이는 1900년대에 다른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로 만 32세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고, 세 번째로 만난 이는 2000년대 초반 중소기업에서 일한 남성 노동자로 만 33세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둘 다 매우 젊은 나이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지만, 유전적 요인이나 가족력은 확인되지 않았다. 근무 시기상 작업환경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면담을 통해 고농도의 유기용제 노출을 추정할 수 있었다.

“라인이나 벽, 바닥이 더러워지면 그때마다 닦아냈어요. 라벨이 없는 통에 (세척제가) 들어있었는데, 바닥에 붓고 천으로 적셔서 맨손으로 닦았어요. 뭔지는 몰랐는데 언젠가 큰 공장에서 일하다 온 선배가 너네 그게 뭔지는 알고 쓰냐며, 위험한 거라고 얘기하데요.”

유기용제는 증기 형태로 호흡기를 통해 흡수되기도 하지만, 액체 상태로 피부를 통해 흡수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노출 기준의 20배에 해당하는 농도의 증기 상태 유기용제에 4시간 동안 노출되었을 때 실험쥐에 흡수된 유기용제의 양은, 액상 유기용제를 실험쥐의 피부를 통해 0.5분간 노출하였을 때 흡수되는 양에 해당한다고 한다.

얼마 전, 첫 번째로 만난 여성 노동자의 담당 변호사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어진 행정 소송에서 파킨슨병을 직업병으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직업적 유기용제 노출에 의한 파킨슨병 발병을 인정한 첫 법원 판결이라고 한다. 급성 질환과 달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질환은 노출과 발병 사이의 기간이 길어 직업병으로 인정받기가 어렵다. 전자 산업이 성장한 시기와 당시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비슷한 사례가 더 나타날 것이다. 이들이 직업병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다면적인 고려가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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