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4월 현장의목소리]다시듣는 현장의 목소리 – 풀무원,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청구성심병원

일터기사

길은 복잡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했을 뿐이다!
– 풀무원 10년 투쟁의 역사를 돌아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김 정 수

3월 23일 금요일 오후 5시, 아직은 제법 차가운 이른 봄비를 맞으며 언론노동자들이 총궐기대회를 진행하고 있는 서울역 광장에서 풀무원 노동조합 박엄선 동지를 만났다. 일터 100호 [현장의 목소리]에 실리게 될 ‘그때 그 현장’ 중 하나로 선정된 풀무원의 박엄선 동지께 인터뷰 요청을 드렸더니 아예 춘천으로 초청을 하셨다. 덕분에 공기 좋은 가평의 어느 민박집에서 동지의 어머니께서 손수 준비해 주신 맛 좋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안주 삼아 밤새 얘기를 나누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다른 노동조합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풀무원 노동조합 역시 10여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역사 속에 소위 ‘자~알 나가던’ 영광스러운 순간과 ‘찌그러지던’ 힘겨운 순간이 공존하고 있다.
“생명을 하늘처럼” 여기면서 “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바른 먹거리”를 만들어 내겠다는 “청정기업” 풀무원. 그런 풀무원에서 만든 먹거리들이 사실은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저임금에 시달려 온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골병 든 풀무원 춘천 공장 노동자들이 – 지금 우리 연구소의 전신인 근골격계 공동연구단과 연대하여 – 근골격계 질환으로 집단요양투쟁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풀무원 춘천 공장 노동자들이 ‘인간 선언’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의 힘이 깔려있었다. 2000년 8월 29일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 해 말 체결한 단체협약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75%에 달하던 비정규직을 전원 정규직화 하는 것이었다. 2001년 역시 사측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아웃소싱을 막아내는 것이 그 해의 핵심 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그 힘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풀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4년 정점에 이르렀다. “주5일제 실시, 40시간 노동 보장, 단일호봉제 도입, 생활임금 보장, 정기검진 의료비 지원, 자녀 교육비 지원”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요구로 시작한 단체협상이 사측의 불성실한 대응으로 인해 163일 장기파업으로 이어졌다. 그 해 연말 어렵게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적절한 합의지점을 찾아가는 듯하였으나 사측은 곧바로 반격을 시작하였다. 2005년 사측은 단체협약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부위원장을 해고하고, 2007년에는 조직부장과 전 위원장(박엄선 동지)까지 해고하면서 전방위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조합원들을 협박과 회유로 ‘각개격파’하면서 조합을 탈퇴시켜 조합 와해를 시도했다.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비조합원에게만 시간외근로 시키기, 조합원에 대한 인사상 불이익주기, 회식 등 회사 일정에서 조합원 왕따시키기 등)을 동원하여 압박하는 회사에 버틸 수 있는 조합원은 적었고, 노동조합 설립초기 100여명에 달하던 조합원은 현재 1/4 수준으로 줄었다.
지노위 중노위를 시작으로 대법까지 이어진 해고 투쟁은 전원이 승리하여 현장에 복귀하였다. 사측의 해고가 법적으로도 요건을 갖추지 못한 명백히 노동조합 탄압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2003년에 시작해서 최근까지도 계속된 18명(풀무원 춘천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는 다해서 100여명에 불과하다!!!)의 4차에 걸친 근골격계 질환 집단요양투쟁으로 현장의 작업환경도 상당부분 개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합원과 비조합원으로 갈라진 현장은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의 단결된 힘으로 정규직이 되고, 산재 요양을 받았던 많은 노동자들이 조합을 떠난 상황은 그저 착잡할 따름이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박엄선 동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노사관계는 힘의 관계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노동조합의 힘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 또한 ‘살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이 상황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투쟁을 통해 현장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박엄선 동지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는 대목은 따로 있었다. 바로 지난 투쟁의 과정에서 만났던 소위 ‘지도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였던 모습을 얘기하면서였다. 현장의 노동자들이 수년간의 활동을 통해 정말 어렵게 만든 파업의 장을 ‘밀실교섭’, ‘이면합의’를 통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접게 만든 지도부들. 원칙을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은 배척하면서 자기 자리, 자기 조직을 보전하는 것을 가장 우선 순위로 삼는 활동가들. 노사협상과정에서는 노조를 대표하다가 재판 과정에서는 사측에 유리한 허위 사실을 증언하고도 아직까지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고 자리보전하고 앉아있는 일부 노동조합간부들. 분노하는 그의 목소리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실 노동자들이 직접 맞대고 싸워야 하는 자본가들보다 더욱 악랄한 암적인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조직, 어떤 운동에서나 그런 존재들이 있게 마련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제어하고 걸러낼 수 있는 장치 혹은 풍토의 유무는 그 조직, 그 운동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다.
문득 얼마 전에 읽은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길은 복잡하지 않다, 철수와영희]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가 민주노총 위원장 혹은 울산 동구청장 시절 했던 일들의 공과에 대한 평가, 그의 노선이나 사상에 대한 동의 여부를 모두 다 떠나서 그 책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은 바로 실명비판이었다. 그는 자신이 노동운동하면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기술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평가하면서 실명비판을 했다. 실명비판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상대방 혹은 상대 조직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명비판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제어하고 걸러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민주노조운동의 희망은 없다는 절박감!!! 타인에 대한 비판이 비난으로 흐르지 않도록 똑같은 잣대를 스스로에게 적용해 자신의 실책과 한계에 대해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반성하는 그 엄정함!!! 그 절박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엄정함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풀무원 사측은 또 다시 춘천 얼음공장의 컵빙라인에 대해 노동조합에 일언반구도 없이 아웃소싱을 주었다. 노동조합 역시 이에 대응하는 투쟁을 조용히 준비 중이다. 개인적으로 박엄선 동지는 최근 화섬노조 수도권본부장에 취임하면서 조금씩 바빠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책 서문 말미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길은 복잡하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했을 뿐이다.”
풀무원 춘천공장 노동자들이 지역에서, 현장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길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비록 가끔씩 마음이 복잡해지기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가 가야 하는 길, 갈 수밖에 없는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중이다.
일터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싸움을 시작한 2002년에서 지금까지

한노보연 선전위원 흑무

“…하이텍알씨디코리아지회는 회사 측의 노조탄압으로 4년째 장기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 CCTV 감시, 대화 녹취, 감시 자료를 고소고발 자료로 활용, 조합원 부당전환배치, 상여금 지급 차별, 임금인상 차별, 부당해고, 중노위 복직판결 거부 등 4년간 벌어진 하이텍의 노조탄압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찰 정도입니다. 결국 계속된 노조탄압, 감시, 차별로 지회 조합원 13명 전원은 지난 5월 10일 ‘우울증을 수반한 적응장애’라는 평소 들어보지도 못한 정신질환으로 산재신청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05년 6월호 <일터>에 실린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지회, 4년간의 투쟁 이야기’의 도입부다. 사측의 탄압으로 ‘우울증을 수반한 적응장애’ 판정을 받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조합(이하 하이텍)의 조합원들은 2005년 5월, 산재를 신청했다. 노동, 보건의료, 법률 단체로 구성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집단정신질환 해결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매일 아침 선전전, 점심 선전전, 저녁 문화제와 집회, 영등포역/당산역으로의 행진, 100인 단식, 500인 단식으로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벌써 2012년이다. 2005년 끈질기게 이어졌던 근로복지공단 앞 농성은 끝났고, 하이텍 조합원들의 ‘우울증을 수반한 적응장애’ 질환은 행정소송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받았으나 대법원까지 가는 항소심에서 졌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은 자신들의 법률비용 2600만원을 하이텍 조합원들에게 청구했고, 받아갔다.
7년 가까이 시작이 흐르면서 그 사이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도입부에 등장한 글을 썼던 동지는 분회장이 되었고, 하이텍 지회는 분회로 조직체계를 변경했다. 그리고 5명의 해고자 중 김혜진 전 지회장를 제외한 해고자들은 복직을 했다.

길고 치열했던 4년의 싸움
2002년 임금인상투쟁을 시작하면서 싸움은 시작되었다. 회사에서는 ‘돈이 얼마다 들더라도 이 기회에 노동조합을 깨겠다’는 의지로 맞섰고 위원장 단식 32일, 조합원만을 대상으로 한 공격적 직장폐쇄가 이어졌고 조합원들이 현장에 들어가 일을 하려 하면 관리사원들을 동원하여 생산출입문을 막고 폭력으로 이를 막았다. 점심시간에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밥도 먹지 말라’며 식당 정문을 쇠사슬로 잠그고 식당 후문에 관리사원들을 배치시켜 조합원들을 뺀 나머지 인원만을 식당에 들여보내기도 했다. 조합원 13명 중 5명에 대한 해고 이후 중앙노동위원회에서 해고자 5명을 전원 복직시키라는 판결이 났지만 회사는 버텼다. 현장에 복귀한 후, 사측은 조합원 라인을 따로 만들어 놓고 맴돌며 감시했다. 녹음기를 주머니에 갖고 다니며 조합원들의 말을 일일이 녹음했다.
회사는 현장에 CCTV를 설치해 놓고 카메라 렌즈를 조합원 라인에 맞추어 놓고 조합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CCTV에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신문지를 붙이는 조합원의 행동 하나하나를 불법으로 매도하며 경고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조합원 8명에게 7억6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기에 이른다.

노동탄압에 의한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 판정
식당에 못 들어가고, 식수도 공급받지 못했던 시간을 위로받겠다는 듯 먹고 남길 지언정 세 사람은 거뜬히 먹고도 밥을 퍼오고,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화를 쏟아내고 뒤돌아 미안해고, CCTV와 카메라 채증에 숨이 넘어가게 분노하는 하이텍 조합원들의 모습들은 하이텍 사측의 갖가지 탄압으로 인한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였다. 조합원 전원이 ‘만성 적응장애’ 판정을 받았고 그렇게 하이텍 노동조합의 근로복지공단 앞 농성은 시작되었다.
13명 조합원이 산재를 신청했다. 결과는 불승인. 재심사 청구 결과 또한 전원 불승인.

발병의 주된 원인인 스트레스가 노사갈등에서 비롯되었으니, 업무상 질병은 아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한다며 지금은 법 개정으로 없어진 ‘자문의사협의회’를 열었다. 그 결과, 만성적응장애의 발병 사실 자체는 인정되지만, 그 주된 발병 원인이 된 스트레스가 노사갈등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업무상 질병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며 전원 불승인 통보했다. 사측의 불법적 직장폐쇄와 부당해고, CCTV를 통한 감시, 왕따라인 설치를 통한 통제와 감시, 조합원과 비조합원간의 차별 등을 모두 쟁의행위와 관련한 것으로 보면서도, 만성적응장애를 업무상 사유에서 기인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실관계를 규명할 수 없었다고도 했었다.
2002년 싸움을 시작한 이후 모든 일상은 감시와 차별, 폭언과 폭행이었다
2002년 이후의 모든 일상은 감시와 차별, 그리고 폭언과 폭행으로 이루어졌다. 정상적인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투쟁과정에서 한 술 더 뜨고 있다. 심사청구까지 전원 불승인을 내었을 뿐만이 아니라 집회 중인 조합원들에게 감시 카메라 들이대기, 면담단의 멱살을 잡고 폭행/폭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2005년 7월 17일에는 집회조차 하지 못하게 물리적으로 막았으며 테러부대 진압시에 출동한다는 경찰 특공대를 동원에 지회장을 포함한 단식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기도 했다.

지금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집단정신질환 해결 공대위는 ‘하이텍 현장투쟁 승리를 위한 공대위’로 전환하였다. 사측은 2007년, 노동조합과 체결한 단체협약을 일방 해지하고 곧이어 구로공장을 법인분리하겠다는 구조조정 계획을 공표했다. 9월 고등법원 해고자 복직 판결에 따라 11월에 해고자들을 복직시키고 19일 만인 11월19일, 조합원들에게 신설법인으로 전적하지 않으면 정리해고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2008년 2월, 오창에 있는 본사 앞에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컨테이너도 천막도 없이 나무를 떼가며 버텼던 오창 본사 앞 투쟁이었다. 그러나 하이텍 사측은 2008년 7월, ‘조합원 전원에 대한 정리해고’를 통보했고 하이텍 김혜진 지회장은 한강고수부지 송전탑에 올라 단식-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시간을 건너뛰어 2011년 5월, 사측과 합의하면서 김혜진 전 지회장을 제외한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언뜻보면 그간의 고단함을 좀 달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10년간 쉼없이 농성과 단식, 고공농성, 집회로 달려왔으므로 지금은 그간 상한 몸과 마음을 달래는 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켠으로는 2011년 합의된 생산물량을 낮추고, 김혜진 전 지회장의 부당배치전환에 맞선 싸움을 앞두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
하이텍 노동조합의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은 사측의 탄압으로 인한 정신질환도 당연히 산업재해로 인정해야하며, 자본이 갉아먹는 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의 현실을 세상에 알린 싸움이었다. 그리고 정부기관과 법은, 제 아무리 ‘근로자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한다’고 예쁘게 간판을 걸어도 실제는 ‘일하는 이들’의 편이 아니었음을 다시 확인한 투쟁이기도 했다.
그리고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일터

인간다운 삶을 원했다
– 청구성심병원 권기한 지회장 인터뷰

1. 청구성심병원은 어떤 곳인가
청구성심병원은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위치한 200병상의 민간중소병원이다. 1977년개원하여 35년 되었고 은평구에서 유일한 종합병원이다. 노동조합은 1988년 5월에 설립했는데, 첫 해에 낮은 임금과 착취로 파업을 했었고 이듬해인 89년에도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병원측에 대항에 파업했다.
이후 97년 말까지 병원은 고속성장을 했고,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도 인정했다. 320병상과 400명에 육박한 노동자들이 있었고, 97년 말 병원은 고속성장과는 다르게 IMF를 빌미로 탄압했다. 임금체불과 노동자들의 100명 감원을 필두로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98년 상반기 내내 임금체불이 계속되었고 병원측으로부터 전직원들에게 상여금반납, 연/월차, 생리휴가 반납 등 각서가 돌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임금체불과 노동조합 탈퇴공작으로 노동조합을 옥죄기 시작하여 총회투쟁과 중식집회, 점거투쟁 등 단체행동 투쟁으로 맞섰다.
이사장은 노동조합과 합의, 합의번복, 다시 합의, 합의번복 등 노동조합을 옥죄었다. 부당노동행위와 용역깡패를 동원한 노동조합 간부폭행 등이 이어졌고 98년 8월7일 파업전야제 새벽에 병원은 구사대와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똥물투척과 식칼테러를 자행하였다.
98년 12월에 사원대표부를 앞세워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 10명을 정리해고했으나, 99년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로 판정나 전원 복직되었다. 이후 병원은 조합원들을 배치전환, 승진배제 등 인사상 불이익, 왕따, 회식배제, 근무 중 폭언/폭행, 사직강요 등 끊임 없이 지속적으로 조합원들을 괴롭혔다.
조합원들은 오랜 탄압으로 인해 우울증 등 비슷한 증상으로 집단발병했고, 2003년에는 노조탄압으로 인한 정신우울증이 18명 중 11명이 발생했다. 그 해 6월 근로복지공단에 8명의 노동자들이 산재를 신청하고, 근로복지공단과 청구성심병원을 상대로 노조탄압에 의한 집단정신우울증 산재투쟁을 하였다. 투쟁의 결과 2003년 8월 5명에 대한 산재가 인정되고, 추후에 3명이 추가로 산재인정을 받았다. 집단산재 치료 후 피재노동자들이 2004년 현장 복귀한 후 노동조합 탄압이 줄어드는 듯했다.
2006년 조합원이 증가했으나, 병원은 다시 조합원들을 지속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남자조합원에게 성추행혐의를 조작하여 해고를 했다. 해고복직투쟁을 1년 여 동안 했으나, 결국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2008년 초에는 산재투쟁복직한 전 지부장이 병원측의 악랄한 탄압으로 자살기도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투쟁이 계속되었고, 전지부장은 또 다시 산재 재인정을 받았다. 이후 산재기간이 끝난 2009년 말 전 지부장은 병원에 복귀하지 못했다. 노동조합 간부들과 조합원들이 현장복귀하지 않는 것이 사는 길이라 판단하여 설득하였다.
전 지부장에 대한 악랄한 탄압 외에, 2006년 노동조합가입을 주도한 조합원인 수간호사들을 병원이 가만 두지 않고 이들 수간호사 모두를 수시로 괴롭혔다. 회식배제, 경위서 작성, 경고장 남발, 부서신설 후 골방에 가두는 등의 탄압에 2007년 다시 3명의 정신우울증 발병으로 산재신청과 투쟁을 했다. 2003년 노동조합탄압으로 인한 집단정신우울증과 똑같은 상황으로 질병이 발생이 되었는데, 근로복지공단은 결국 산재인정을 하지 않았다.

2. ‘노조 탄압으로 인한 정신질환 산재인정’ 투쟁의 원인과 배경은 무엇이었나
사측에 의한 탄압이 없었다면 정신질환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같이 자행되는 폭언과 폭행이 난무한 일하는 현장과 부서장이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비상식적인 언행과 왕따를 행한다. 부서장인 조합원이 비조합원 부하직원에게 환자들 앞에서 농락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상황이 극도에 달했었다.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당해야 하는 현실을 개인이 감내하고 직장을 퇴사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은 안 된다. 이렇게 불합리한 것을 세상에 까발리고 현장의 주인인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나서지 않으면 건강한 현장을 만들 수 없었다. 건강한 현장, 즐겁고 행복한 현장을 만들기 위해 산재투쟁을 하게 되었다.

3. 당시 가장 힘들었거나, 좋았던 기억은 무엇이었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일터의 같은 노동자인데 나와 반대편에 서 있는 구사대들이다. 그들은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며, 사측의 의도에 따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같은 노동자끼리 싸워야 하는 현실이 가장 힘들었다. 사측이 같은 노동자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현실이 너무 미치도록 힘겨웠다. 그렇게 만드는 자본은 인간을 한낱 도구로 이용하는 것 같다.
좋았던 기억은 투쟁의 현장에 달려와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다. 탄압에 투쟁으로 저항하는 현장상황에서 기꺼이 달려와 준 동지들이 너무도 고맙다. 항상 마음에 담고 있다.

4. 노동조합이나 사회에 있어 이 투쟁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원진레이온 이후 노동조합 탄압에 의한 집단정신질환 산재는 처음이라고 들었다.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이 지금도 좋지는 않지만, 과거보다 대중의 인식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본의 착취는 끊임없다. 고귀한 생명의 가치보다 이윤이 앞서는, 인간의 존엄이 파괴되어도 용인되는 그런 사회는 누가 보아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은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다. 자본의 탄압에 투쟁으로 맞서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자본의 노동자탄압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 한다. 청구성심병원 노동자 투쟁이 집단정신질환에 대한 산재투쟁이라 사례로 남겠지만, 이후 여러 사업장에서 노동자를 탄압하는 비슷한 사례들에 문의 전화가 왔다.
이명박정권은 아예 처음부터 노골적이었다. 산재투쟁을 두 번했고, 똑같은 상황 똑같은 질병이지만 2003년에는 인정받았고 2008년에는 인정하지 않았다.

5. 지회장 동지에게 이 투쟁은 어떤 투쟁의 의미인가

고 이정미 전 청구성심병원노조 위원장
나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행복과 안녕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다. 직장을 다니고 일과 나에게 가까운 것들에 만족하고 살았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자본은 돌변하여 나와 주위의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원상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투쟁하지 않으면 마지막엔 내 몸마저 빼앗길 것이다.

6. 당시 투쟁 했던 조합원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산재투쟁까지 노동조합의 지부장을 맡은 이정미 열사가 생각난다. 암투병을 하면서도 산재투쟁을 맨 앞에서 이끌었는데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다. 2007년부터 이정미 열사정신계승사업회를 꾸리고 중소/영세/여성/비정규직투쟁을 지원하고 싶다는 이정미열사의 뜻을 받아 사업을 하고 있다.
김미연, 임우숙, 권기한, 허윤희, 강영옥, 김선미 모두 청구성심병원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다시는 극도로 처절한 상황이 발생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은 청구성심병원의 현장에서 떠났지만 이선우 전지부장, 최윤경 전지부장, 이명 조합원 , 김명희 조합원,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로 간호사로써 물리치료사로써 현업에 있거나 살림을 하고 있다.

7. 그 투쟁 이후 노동조합이나 현장의 변화는 무엇이었나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은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자본가가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은 건드리지 않을 뿐인 것 같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고도 반성하지 않는다. 97년말부터 2008년말까지 계속 투쟁했다. 10년 넘게 투쟁했다. 자본은 망하지 않는다. 망하게 하려고 싸운 것은 아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싸운 것이다.
2008년 말 이후 몇 차례 임금교섭이 잘 풀리지 않아 몇 차례의 집회 이외에는 투쟁이 없었다. 산재사고 예방 등 사측에게 변화를 주었다. 주요 산재사고사업장으로 수시로 관리 감독을 받았다. 하지만 노동조합을 대하는 약간은 조심스런 태도를 빼고는 현장의 변화는 없다.
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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