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A뉴스]과로-간질환 판결, 의학계 불똥

과로-간질환 판결, 의학계 불똥
법원 "간학회 못믿겠다"... 간학회 "굉장한 모욕" 


과로·스트레스와 간질환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법원의 판결이 의학계를 술렁이게 하고 있다.

법원이 객관성 결여를 이유로 전문 학회의 의견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24일 서울행정법원은 간암으로 사망한 외교통상부 서기관 김모씨 부인이 유족 보상금 지급을 거부한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씨의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가 간질환을 급격히 악화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문제가 되는 대목은 과로·스트레스와 간질환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례의 근거였던 대한간학회의 보고서가 잘못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 부분이다.

재판부는 간학회의 보고서가 근로복지공단의 의뢰를 받아 작성됐다는 사실에에 의혹을 제기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지금까지 과로와 간질환의 인과관계를 부정해왔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같은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간학회는 물론 의학계 전체가 당혹스런 분위기다.

재판부의 판결은 자칫 최고 전문가 집단 중 하나인 의학회가 연구 의뢰자의 입맛에 맞게 연구결과를 도출한 것으로 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공정성이 의심된다?

재판부는 간학회 보고서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의뢰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객관성과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혹은 과학자에게는 치명적이다. 문제 제기의 당사자가 사법부라면 해당 학자가 느낄 충격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현재 대한간학회 임원을 맡고 있는 모 의대 교수는 "학자의 연구결과를 놓고 공정성 결여를 운운하는 것은 연구자는 물론 학계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간학회 관계자는 "연구 의뢰자가 소송 당사자이기 때문에 보고서가 편파적으로 작성됐을 것이라는 생각은 의학 논문을 컨설팅업체 보고서 수준으로 밖에 보지 않는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특이 이 보고서는 작성자 스스로 '역작'이라고 강조할 정도로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관련인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문제의 보고서에는 어떤 내용이

지난 2001년 이영석 가톨릭의대 교수가 작성한 '간질환 관련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 보고서는 업무상 간질환의 종류, 특히 과로·스트레스와 간질환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보고서는 "과로나 스트레스는 주관적 측면이 매우 강해 업무에 대한 숙달정도, 흥미, 기대감, 성취감 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고, 또한 개인의 능력이나 성격상태, 질병상태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며 "과로나 스트레스가 업무상 재해에 관련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로나 스트레스에 대한 객관적 기준과 함께 업무 연관성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지만 이를 규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킬 수 있는 경우는 고혈압, 심장질환(관상동맥질환), 뇌출혈(지주막하 출혈), 당뇨병 등 극히 일부 질환에 해당되며,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의학적, 자연과학적 접근방법이 요구되고 있다"며 "그러나 과로나 스트레스가 간질환을 유발시키거나 악화시킨다는 의학적 근거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보고서의 핵심은 과로·스트레스와 간질환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있다고 추정할 만한 과학적 연구결과가 지금까지 제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업의학회 입장은 받아들였다?

이번 판결에서 또 다른 논란거리는 재판부가 간학회의 의견은 공정성 등을 이유로 배척한 반면 대한산업의학회 의견은 존중한 것으로 알려진 점이다.

실제로 선고 공판에 앞서 지난해 12월 21일 심리에서 재판부는 대한산업의학회가 제출한 문서를 인용, 간질환과 스트레스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간학회 주장을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산업의학회측에서는 스트레스와 간질환 사이의 인과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대한산업의학회 한 임원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내외 연구논문을 살펴보면 스트레스와 간질환이 관련이 있다는 주장과 없다는 주장이 다양하게 나와 있다"며 "학문적으로 명확히 규명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또 "산업의학 영역에서 하고 있는 '업무관련성 평가'는 고위험군 관리 및 질병 예방을 위한 것이지 근무 조건과 질병 사이의 연관성 규명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스트레스-간질환 연관 부분에 대해 "스트레스가 면역력과 항상성 유지를 떨어뜨리고, 다양한 질환을 유발한다는 이론적 틀은 있다"며 "그러나 간질환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들은 스트레스 뿐만 아니라 다양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간학회나 산업의학회 모두 과로·스트레스와 간질환 사이의 과학적 연관성은 현재로서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부는 왜 산업의학회 의견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했을까.

사회적 파급효과도 생각해야

간학회 보고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업무상 질병 판정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다.

저자인 이영석 교수는 "직무생활 동안 업무상 질병이 발생되는 것은 근로자나 가족, 기업 뿐만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일"이라며 "공정하고 객관성이 있는 판정을 통해 업무상 재해를 입은 해당 근로자나 가족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객관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기업이나 사회가 수긍할 수 없는 판정이 거듭되면, 기업은 위축돼 경쟁력이 떨어지고, 불필요한 소송의 남발로 새로운 사회적 갈등이 야기돼 경제적 사회적 손실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기업으로서는 위험 부담률이 높은 근로자를 기피하게 되어 이미 취업하고 있는 직장인에게 불이익이 초래될 수 있으며, 미취업자에 대해서는 취업의 기회가 더욱 더 좁아지게 된다"며 "군복무를 마친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능력과 관계없이 B형 간염바이러스 보유자라는 이유로 취업이 제한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즉 명확한 근거 없이 환자측의 억울한 호소에만 귀기울일 경우 사회 전체에 가져올 수 있는 불이익의 파장이 매우 클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는 것이다.

대한간학회의 한 임원 역시 "법원이 약자의 편을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며 "의사 역시 환자가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많은 보상을 받기 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과로와 스트레스라는 애매한 잣대로 간질환과의 연관성을 인정할 경우, 그에 따른 사회적 파급효과를 무시하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산업의학계 입장과 차이가 있다. 

산업의학회 한 임원은 "산재 판정이 많이 내려지면 사업자가 위축돼 결국 근로자의 불이익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입장은 충분히 타당하다"며 "그러나 취업과 보상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다.

즉 사업주의 취업자 차별행위는 제도적으로 보완할 문제이고, 근로자가 산재로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은 최대한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지난해 부터 사업체의 채용 건강검진제도가 폐지된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종합해보면 재판부는 이번 판결을 스트레스와 간질환 사이의 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내렸다기보다, 근로환경과 질환 간의 역학관계라는 기본적인 이론적 틀 속에서 일반적인 상식에 무게를 두고 보상 여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해석된다.

엇갈리는 판결, 끝나지 않는 논쟁

지난 97년 대법원은 간암으로 사망한 공장 노무담당 팀장에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2000년에는 서울행정법원이 경제지 기자의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가 B형간염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하는 원고측의 손을 들어줬다.

2001년에도 대법원이 B형간염보유자가 간암으로 사망한 사건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반면 1999년 서울행정법원은 모 회사 부사장이 간암으로 사망한 경우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2001년 서울행정법원도 시내버스 운전기사의 간암발병을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2002년 대법원은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해 간질환이 발생되거나 악화됐다는 점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의학적 소견과 다르게 인과관계를 추단하기 위해서는 해당 근로자가 예외적으로 과로·스트레스로 인해 간질환이 정상적인 경우보다 더 악화됐다는 점에 대한 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독 간질환과 관련된 산업재해 소송에서 상하급심 사이에 판결이 엇갈리고 있는 현실은 과학적 근거 보다 근로자 개별적인 상황이 산재 판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는 스트레스-간질환의 연관성을 둘러싸고 사법부와 사업자, 근로자, 학계 간의 논쟁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예상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의협신문 이석영기자 lsy@kma.org 
한노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