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노동의 그늘, 직업병] 노동자 위협하는 직업병 (1) 과로와 스트레스

쓰러져도 당국은 법규정 타령만

40대 후반의 경남지역 제조업체 생산직 노동자 손정희(여·가명)씨는 정신과 질환인 '적응장애'로 산재승인을 받아 요양중이다. 김씨는 왜 정신질환에 걸렸나. 지난해에 김씨가 다니던 회사의 일부 노조원들은 파업을 단행했다. 김씨는 비참가자였다. 그런데 파업이 해결되자 사측에서는 파업참가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집단 왕따 분위기도 조성했다. 김씨는 지나가는 말로 작업반장에게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사측에서는 김씨에게도 불이익을 주었다. 키가 매우 작은 김씨는 높은 공간에 적재된 물건을 내리고 쌓는 일을 새로 배정받았다. 통상 남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사측에서는 김씨에게 목욕탕과 화장실 청소도 시켰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과 우울증 증세가 찾아왔다.
 
"만성적이고 관행화한 과다한 노동시간과 전근대적인 노무관리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사진은 한 의류관련 작업장의 모습. "


'첫 사례' 부담감 공론화 망설여
 
 
 
산재요양신청을 하려고 했으나 사측에서는 신청서 날인을 거부했다. 김씨는 사측 날인 없이 신청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부산·경남 일원에서는 전례가 없다면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김씨는 노동단체의 도움을 받아 매주 진행상황을 체크했다.

공단 자문의들이 작업과의 연관성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서울 백병원을 특진 병원으로 지정해 2주 동안 입원 검사를 받은 뒤에야 적응장애로 산재승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이중 고통을 겪었다. 김씨는 주위에 '사측 사주를 받았는지 동료들이 찾아 와 불승인 날 거라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게다가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생계비 때문에 이래저래 피가 마르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노무관리와 질 낮은 업무 등으로 인한 직무스트레스는 직업병 유발인자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직무스트레스와 정신질환의 인과 관계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상법)에서는 직무스트레스나 과로와 관련된 직업병으로 뇌실질내출혈을 포함한 뇌출혈,지주막하출혈,뇌경색,고혈압성 뇌증,협심증,해리성 대동맥류,심근경색증 등만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김씨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직무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는 노동자들은 한층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법에서 직무와 직업병의 인과 관계를 본인이 증명하도록 한 상황에서 사측이 요양신청서에 날인을 거부할 경우에는 더욱 막막한 상태에 놓이게 마련이다.

이와 관련,근로복지공단 부산지사 김병일 차장은 '현재 산재보상법에서 명시한 '만성과로'는 육체적인 면을,'급격한 작업 환경 변화'는 정신적인 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수준인데 스트레스의 경우에는 계량화가 쉽지 않고 의학계에서도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애로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최근 들어 정신질환에 대한 산재인정 여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어서 공단과 노동부에서는 스트레스와 관련된 구체적 지침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과로로 인한 산재승인 여부는 직무스트레스에 비하면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산재보상법에 '업무량과 업무 시간이 발병 전 3일 이상 연속적으로 일상 업무보다 30% 이상 증가하거나'하는 식의 일정한 기준이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로로 인한 뇌심혈관계 질환의 발병과 과로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남지역 모 제조업체의 생산직 노동자 김성일(32·가명)씨의 예를 보자. 김씨는 2년 전 작업장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병명은 '자발성 뇌실질내출혈'이었다. 김씨는 수술을 받은 후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산재요양신청을 해서 산재 승인을 받았다.

김씨의 경우는 과로가 직업병을 유발한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김씨는 그동안 '24시간 근무,24시간 휴식'의 2교대 근무를 했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오전 9시에 퇴근하는 방식이다.

이를 산술적으로 따져 보면 수면,휴식,식사시간 등을 제외하고도 1일 노동시간은 무려 18시간에 이른다. 한달(30일 기준)로 따지면 270시간이다. 법정 노동시간을 준수하면 190~200시간 정도이다. 김씨는 필연적으로 '만성적인 과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김씨는 이런 상황에서 품질향상운동 기간에 품질분임조 서기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경진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피로와 직무스트레스가 가중되었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사무직 생산직을 가릴 것 없이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런 식의 만성적 과로 상태에 노출돼 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2001년 9월자 보도를 보면 우리나라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5.1시간으로 세계 1위에 올라 있는 상태다.

이로 인한 과로와 직무 스트레스는 결국 뇌·심혈관계질환을 비롯한 직업병 발병 및 과로사로 연결되고 있다. 과로사 정도를 유추할 수 있는 '뇌·심혈관계 질환 발생 및 사망자 수(노동부 자료)'를 보면 1999년 628명-2000년 1천950명-2001년 2천192명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질환이 직접 사인이 된 경우도 1999년 324명-2000년 658명-2001년 680명으로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부산대 산업의학과 강동묵 교수는 '과로와 직무스트레스가 뇌·심혈관계질환과 정신질환,근골격계질환 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상당 부분 사회 합의를 이루었다고 판단된다'면서 '국가는 한 걸음 앞서 나아가 광범위하고 정밀한 역학 조사를 통해 예방대책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고 발병자에 대해서는 보상과 이차적인 경제적·사회적 손실에 대해 배상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광우기자 leekw@busanilbo.com




입력시간: 2004. 08.16. 09:42
 
 
 
김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