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사무직 근골격계 질환

[노동의 그늘, 직업병] Ⅱ. 노동자 위협하는 직업병 <3> 사무직 근골격계질환
남 보기는 편해도 '위험'은 널려있다
2004/08/30 025면 09:56:17  프린터 출력 


근골격계질환(본보 23일 22면 상자기사 참조)은 최근 들어 조선업과 자동차업 등 생산직 사업현장에서 주요 이슈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근골격계질환을 생산직 노동자에게만 발생하는 것쯤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근골격계질환은 사무직 노동자들 곁에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 사회적 논의 자체가 적막할 따름이다. 문제는 냉·온풍기까지 구비된 '안락한' 사무실에서 무슨 직업병 타령을 하느냐는 식의 인식이다. 취재 중에 만난 한 30대 여성 노동자의 반문은 그런 실태를 잘 보여준다. '한여름에도 용접 불꽃과 싸워가며 묵직한 철근 옮기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노동자들이 있는데,사무직 업무를 보면서 목이나 허리 좀 아픈 게 산재거리가 되나요?'
A공단에서 10여년째 근무 중인 이미영(34·가명)씨는 최근 몇년 동안 집안 청소를 해 본 적이 없다. 남편과 철저히 가사분담을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속사정은 전혀 다르다. 4년 전에 입은 산재의 후유증 탓에 오른쪽 손목과 손에 무리한 힘을 줄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당시 이씨는 2년째 건강검진용 자료 입력을 도맡고 있었다. 매일 8시간 동안 300~400여명의 키,몸무게,혈당 등을 일일이 타이핑해서 컴퓨터에 입력했다. 직원들 사이에선 '기피 0순위'로 불렸던 업무였다. 그러던 중 어느 때부턴가 오른쪽 손가락 마디가 저리고 부어오르더니 심해지면 '찡'한 느낌이 팔꿈치,어깨쪽을 타고 목까지 전해졌다. 밤엔 울고 싶을 정도의 통증에 시달렸고,파스를 옆에 끼고 살았다.

참다 못한 이씨는 두달간 병가를 냈다. 쉬는 동안 호전기미가 보여 직장에 복귀했지만 이내 재발했다. 치료비 등으로 인해 곤혹스러워 하던 이씨는 노조를 통해 직업병 요양 신청 절차를 알게 됐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근골격계질환인 건초염으로 산재승인을 받았다. '처음엔 산재처리를 생각조차 못했죠. 다들 한 번씩 경험하는 증상이라고 해서…. 혼자만 별스럽게 튀어서 좋을 게 없잖습니까?'

업무전산화가 보편화되면서 컴퓨터 작업에 친숙한 사무직 노동자들은 이씨와 같은 근골격계질환의 위험 앞에 항상 노출돼 있다. 거북목증후군,어깨 등에 통증을 유발하는 근막통증후군,요통,손목주변 인대가 손상되면서 발생하는 수근관증후군,손목 건초염,주관절 외상과염(테니스 엘보) 등 그 양태는 매우 다양하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몇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지난 97년 'VDT 취급 노동자 작업관리지침'이란 걸 마련했던 노동부는 지난해에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규칙'을 개정하면서 근골격계 부담작업 범위 11개 항목<상자기사 참조>에 컴퓨터 작업을 포함시켰다. 컴퓨터 관련 질환이 직업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준거틀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사무직 노동자가 컴퓨터 관련 질환은 물론 여타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재승인을 신청하는 사례는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회사나 동료와의 관계,간단치 않은 산재승인 과정 등도 이유가 되겠지만 가장 커다란 요인은 사무직 노동자들의 인식. 대부분 자신의 증상이 산재의 대상이 되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의학과 교수들은 사무직 근골격계질환을 '물밑에 푹 가라앉아 있는 직업병'이라 부르고 있다.

부산대병원 강동묵 교수는 '노동자들을 면담해 보면 직업병은 3D업종의 작업장에서나 발생하는 게 아니냐는 식의 반응이 많다'면서 '사무실에서도 작업조건,작업환경에 따라 근골격계질환이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의학계에 따르면 사무직 근골격계질환의 유해요인은 컴퓨터 작업 외에도 단순반복작업,부자연스러운 자세,작업공간이 좁거나 책상 높낮이가 몸에 맞지 않을 경우 등으로 수두룩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하루종일 앉은 채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일하면 요추부 부담이 서 있는 자세 못지 않다고 한다.

노동계 내부적으로는 사무직 노조의 역할론에 대해서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일고 있다. 생산직 노조에 비해 사무직 노조가 근골격계질환을 당면 과제로 챙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정상래 산업안전국장은 '사무금융노조 등 대부분의 사무직 노조에는 직업병을 다루는 산업안전팀이 아예 없다'면서 '민주노총 차원에서 사무직의 직업병 문제를 조직화할 수 있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덧붙였다.

상대적으로 회사 간부급 등 노조 가입이 여의치 않은 직위의 사람들은 더욱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

20여년간 한 중소업체에서 근무한 이호영(52·가명)씨. 이씨는 부장으로 일하던 2002년 경추간판탈출증,근막통증후군 등으로 산재를 신청했다. 그는 2년 전 허리가 아팠을 때 회사 측의 주선으로 한 차례 산재승인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회사 측의 반응이 정반대였다. 산재담당직원은 '얼마 전에 발생한 교통사고 때문에 그런 게 아니냐. 당신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 게다가 '앞으로 이 병이 재발하면 본인의 귀책사유이지,회사 측과는 무관하다'는 내용의 각서까지 써야 했다. 가까스로 일부 승인을 받았지만 이미 인격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후였다. 그 일이 있은지 1년 후 이씨는 사직서를 쓰고 회사를 나왔다. 그는 '노조에 의지할 수 있었으면 한결 나았을텐데…계속 싸워 볼 만한 기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무직 업무의 특성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테면 월말이나 월초에는 야근,결재,업무스트레스 등이 집중되게 마련인데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계량화 하기가 힘든 측면이 많은 것이다.

고신대병원 김진하 교수는 '그러나 사무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건강권은 자신이 보호한다는 인식을 갖고 산재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임태섭기자 tslim@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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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는 지난해에 예방 차원에서 근골격계 부담작업의 범위를 정했다.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관계가 없다. 부담작업 범위는 모두 11개 항목. 여기에 해당하는 작업장의 사업주는 유해요인조사 및 그 결과에 따른 작업환경개선 등의 보건조치를 취해야 한다. 위반시에는 벌금,구속 등의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부담작업 범위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규정이 지나치게 협소하고 개개인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점,컴퓨터 업무 외의 사무직 작업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 등이다.

△하루에 4시간 이상 집중적으로 자료입력 등을 위해 키보드 또는 마우스를 조작하는 작업.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목,어깨,팔꿈치,손목 또는 손을 사용하여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작업.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머리 위에 손이 있거나 팔꿈치가 어깨 위에 있거나,팔꿈치를 몸통으로부터 들거나,팔꿈치를 몸통 뒤쪽에 위치하도록 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작업.

△지지되지 않은 상태이거나 임의로 자세를 바꿀 수 없는 조건에서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목 이나 허리를 구부리거나 트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작업.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쪼그리고 앉거나 무릎을 굽힌 자세에서 이뤄지는 작업.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지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1㎏ 이상의 물건을 한 손의 손가락으로 집어 옮기거나,2㎏이상에 상응하는 힘을 가해 한 손의 손가락으로 물건을 쥐는 작업.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지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4.5㎏이상의 물건을 한 손으로 들거나 동일한 힘으로 쥐는 작업.

△하루에 10회 이상 25㎏ 이상의 물체를 드는 작업.

△하루에 25회 이상 10㎏ 이상의 물체를 무릎 아래에서 들거나,어깨 위에서 들거나,팔을 뻗은 상태에서 드는 작업.

△하루에 총 2시간 이상,분당 2회 이상 4.5㎏ 이상의 물체를 드는 작업.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시간당 10회 이상 손 또는 무릎을 사용해 반복적으로 충격을 가하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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