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Ⅲ 건강한 일터를 위한 제언-10/04

[노동의 그늘, 직업병]
Ⅲ 건강한 일터를 위한 제언
<1> 직업병 진단체계 상 신청·승인 하세월… 외로운 싸움 언제까지

2004/10/04 022면


 '치료를 완벽하게 하고 싶고 운수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이런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산재요양을 결심했습니다. 회사에서 인정을 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과 불승인 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산재요양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회사의 날인 거부와 근로복지공단의 처리 지연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두 달이 걸려 승인을 받아 휴업한 후에는 휴업급여가 임금의 70%밖에 나오지 않아 생활비 문제로 가정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회사는 장비 실태를 조사한 후 개선하고, 사회는 상대적으로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바라봐 주었으면 합니다.'

 시내버스를 몰던 김을용(37·가명)씨는 '경추 척수병증(경성디스크)'이란 질환으로 산재승인을 받아 요양 중이다. 김씨의 말을 들어보면 산재요양신청과 승인 그리고 사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심리적·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측에서는 '산재보험료가 인상되고 추가 사례가 나올 수 있다'면서 환자로 인정하길 꺼렸고,근로복지공단에서는 직업과 질환의 인과관계를 김씨 본인에게 증명하라고 했다. 혼자서 모든일을 처리해야 했던 김씨는 산재도우미(조력자)의 필요성에 대한 견해를 자주 밝혔다.

김씨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사고로 인한 명확한 산재나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명시된 주요 질환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산재요양승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다.


# 회사 날인 제도 타당한가


현행법을 한번 보자. 노동자가 산재보험 급여(휴업급여와 치료비) 혜택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사전승인인정절차'를 거쳐야 한다. 본인과 회사의 날인,주치의의 소견서가 포함된 요양신청서 등 3부를 작성하고 증빙서류를 첨부해 근로복지공단 등에 제출해야 한다.


'회사의 날인' 과정부터가 여의치 않다. 규정상으로는 회사가 날인을 거부할 경우 회사의 날인 없이 신청서를 접수시킬 수 있지만,이 과정에서부터 이런저런 갈등이 발생한다.


김씨와 마찬가지로 해당 노동자들은 사측과의 갈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 이런 현상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에서 양상이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신대병원 김진하 교수는 ''회사의 날인' 규정은 단순히 소속 회사를 알아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엄연히 회사 측의 사전 조치 빌미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관련 규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회사 측에서 부담하는 보험료의 경우 자동차보험요율 산정 방식과 비슷하게 공단의 보험금 지급 비율에 따라 누진되거나 하향조정되는데 이 방식에는 획일적 측면이 있다'면서 '일을 하다 보면 환자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회사 측의 능동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현재의 획일적 요율 산정 기준서 탈피해 회사 측 관리소홀 문제에 초점을 맞춰 유연하게 보험료 산정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신청자 인과관계 증명 제도 타당한가


김씨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신청자 본인이 직업과 질환의 인과관계를 증명하도록 한 현재의 제도는 강력한 노조나 지역 노동단체의 도움을 받기 힘든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 같은 나라를 본떠 노동자가 산재요양신청을 하면 국가가 직업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하는 방식을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우리 법원이 의료사고 분쟁 시 의사로 하여금 의료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한 제도를 원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 판정 기간 줄일 방법은 없나


신청에서 판정에 이르는 기간 역시 풀어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다. 그 과정을 한번 보자. 신청서가 접수되면 공단에서는 사측에 확인을 한다. 그런데 사측이 협조를 잘 하지 않으면 사측을 대상으로 확인 작업을 하는 데만 한두 달이 소요되기도 한다. 그 이후에도 공단에 대한 진술(2~3주)→자문의 심사(1주)→주치의와 자문의의 소견이 다를 경우 특진 소견 확보(1~2주)→특진(길면 한 달 이상)→공단의 최종 판정 등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의 사례들을 보면 신청에서 판정까지 통상 2~3개월이 소요되고 있다. 물론 노동자가 신청을 준비하는 기간은 제외돼 있다. 만약 불승인이나 행정소송까지 간다면 1~2년은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법에서는 그 기간을 7일로 못박고 있지만 이는 순수한 행정처리 기간에 불과하다.


사실 관계 확인 등에 걸리는 기간 등은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공단의 사정과 의지 그리고 질환의 성격에 따라 기간이 들쭉날쭉한 실정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공단의 인력 문제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공단에서는 몇 년 전 외부의 업무진단 용역을 거쳐 전국적으로 400여명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부에 충원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는 답보 상태에 놓여 있다.


근로복지공단 부산본부 김두진 보상부장은 '산재 보상 업무가 인력에 비해 과부하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노동 현장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 특수건강진단,제대로 해야 한다


한국산업안전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진단 시스템은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다.


공단의 노동자 건강진단 실무지침을 보면 배치전 건진,특수건진,수시건진,임시건진 등이 있다. 이들 건진을 통해 건강상의 문제가 발견된 노동자들은 산업의학적인 평가를 거쳐 요양,보상,재활 등을 비롯한 사후 관리를 받는다.


특수건진과 수시건진에 대해서는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수시건진을 보자. 수시건진은 해당 노동자나 노동자 대표,명예감독관 등이 사업주에게 요청하면 실시된다.


그러나 단서조항이 비현실적이라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단서조항은 '사업주가 직전 특수건진을 실시한 기관(병원)의 의사에게 자문을 받아 수시건진이 필요하지 않다는 자문결과서를 받은 경우에는 제외한다'라는 것이다. 요컨대 특수건진 의사의 판단에 따라 실시할 수도 있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특수건진의 엄정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현실적으로 특수건진기관은 사업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사업주가 건진기관을 선택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사업주와 건진기관의 관계를 흔히 '갑과 을의 관계'라 부르고 있다. 건진기관들 간의 수주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덤핑' 사례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결국 건진기관이 소신에 따라 유소견자 판단을 내놓기 힘든 시스템이란 얘기다.


특수건진은 또한 통상 업무시간 중에 이루어지는 탓에 사업주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대상을 적게 하고 빨리 끝내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현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유해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들이 사측의 의지에 따라 혹은 지역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의사 1~2명이 문진표를 기준으로 300명 이상을 하루만에 검사하는 게 통례화돼 특수건진에 대한 신뢰도는 매우 낮은 형편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정상래 산업안전국장은 '특수건진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대 수준은 매우 높은데 건진기관들이 진단을 할 때 해당 작업환경의 특성,대상 누락 여부,유해성 검토,자료심사 등의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신뢰도는 지극히 낮다'고 전했다.


부산대병원 강동묵 교수는 '특수건진은 직업병 예방과 공공보건의 차원에서 도입된 것인데 영리 문제가 개입되면서 왜곡된 측면이 있다'면서 '현재의 왜곡된 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피해자 겸 수혜자인 노동자 개인이 병원 선택권을 갖도록 하고,궁극적으로는 국가에서 지역보건소 등 공적 의료기관을 통해 특수건진을 실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광우기자 leekw@busanilbo.com
 

한노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