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생산직 근골격계 질환

[노동의 그늘, 직업병] Ⅱ. 노동자 위협하는 직업병 <2> 생산직 근골격계질환
산재 인정 다툼 속 깊어가는 '골병'
2004/08/23 022면 09:27:55  프린터 출력 


'아픈 걸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지리한 공방으로 몇개월을 흘려보냈습니다. 아둥바둥 살아보겠다고 이를 악물고 일하다 이렇게 됐는데,정말 억울하고 분합니다.' 한 중소제지업체에 다녔던 정미영(45·가명)씨. 돈 한푼 벌지 못하고 6개월째 속절없이 병원치료만 받고 있다. 추간판탈출증,즉 디스크로 직업병 요양신청을 했지만 여태 승인을 받지 못해서다. 이러는 동안 모자가정인 정씨네는 엉망진창이 되버렸다. 고1,중3인 두아들은 다니던 학원을 그만뒀다. 전세금을 빼서 생활비로 변통하고 방값은 월세로 돌렸다. 친정에 손을 벌리고 있자니 마음은 천근만근이다.
정씨 몸에 이상증상이 나타난 건 지난 2월. 불철주야 2교대로 파지작업과 재생종이 선별작업을 한지 6개월만이었다. 60~70㎏쯤 되는 재생종이를 땅에 눕히는 도중 허리가 뜨끔해 비명을 질렀다. 한두달 전부터 허리가 뻐근하긴 했어도 며칠 푹 쉬고 나면 회복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통증이 달랐다. 병원을 찾은 정씨는 허리디스크로 판정을 받았다. 사측은 30만원에 합의를 종용했고,예전부터 앓아왔던 기왕증이 재발한 것 아니냐며 다그쳤다. 우여곡절 끝에 요양신청을 했지만 공단은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요양신청서와 MRI판단 소견서 등을 볼 때 재해와 무관한,퇴행성으로 인한 기왕증으로 판단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막막해진 정씨는 지역 노동단체의 도움으로 몇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공단이 현장조사와 특진 등 다툼이 예상될 경우 실시해야 할 몇가지 절차를 누락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정씨가 이의제기서를 넣자 공단은 부리나케 직원 2명을 보내 현장조사를 하더니 지난 5월말 일부승인 통보를 해왔다. 요추부염좌는 인정되나 디스크는 아니란 결론이었다. 이에 불복한 정씨는 현재 공단에 심사를 청구해 놓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정씨 사례는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재판정을 받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근골격계질환은 노동자들이 '골병'이라 불러왔던,겉보기엔 멀쩡한데 속으로 곪아터져가는 바로 그 질환이다. 통상 직업병과 무관하게 '내 몸이 문제지'라고 여겨져왔던 근골격계질환은 1996년 한국통신 전화교환원 66명이 경견완장해로 산재인정을 받으면서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그러나 근골격계질환은 의학적으로 두부 자르듯 명쾌한 진단을 내릴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노동계와 공단간,노동계와 경총간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정씨 사례에서 봤듯 퇴행성과 작업관련성 여부. 노동자 개인의 자연발생적 퇴행성 질환이 작업환경의 영향을 받아 얼마나 악화됐는지,그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밝혀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단 부산본부 한태희 상근자문의는 '근골격계질환은 퇴행성인지,직업병인지 명확하게 구분짓기 곤란한 측면이 많다'며 '그럼에도 불구,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근골격계질환 판정이 훨씬 관대한 편'이라고 공단측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노동계의 평가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근골격계질환이 애매한 질환이란 점엔 동의한다. 문제는 공단이 노동자의 실제 작업현장의 현실을 간과한 채 눈에 드러나는 의학적 소견만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짙다는 것. 이 때문에 병든 노동자가 퇴행성이라는 이유로 불승인 처리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이은주 사무국장은 '직업병 판정은 노동자의 신체특성뿐 아니라 작업특성,작업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공단이 이 부분을 소홀히 취급하는 바람에 직업병이 일반질환으로 과소평가되는 일이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즉,상당수 공단 자문의가 현장조사도 없이 첨부된 CT필름과 서류 위주로 작업관련성을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공단 자문의로 위촉받아 활동중인 한 의사의 고백은 이 사무국장의 지적을 뒷받침한다. '공단 업무지침상엔 퇴행성도 직업병으로 인정할 수 있는 단서가 있지만 몇몇 필름에서 퇴행성이 발견되면 불승인나기 쉽다. 한편으론 현장조사를 하려해도 사측에서 '왜 방문하려고 하느냐'는 식으로 대응하는 갑갑한 사정도 있다.'

이와 관련,노동계와 산업의학계는 산재승인의 근거법인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상법)에 규정된 근골격계질환 인정기준을 노동현실에 부합하도록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지나치게 좁아 상당수 근골격계질환이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대병원 강동묵 교수는 '현행 산재보상법 근골격계질환 인정기준을 보면 경견완증후군,몇가지 요통 등을 열거하고 있지만 사실상 퇴행성질환을 제외시켜놓고 있다'며 '지난해 산업의학회 차원에서 노동부에 개정안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산업의학회는 근골격계질환을 열거식이 아니라 다소 포괄적으로 규정했다.

요양기간을 둘러싼 민주노총과 경총간 대립도 첨예하다. 경총은 요양이 장기화되고 있으니 요양기간을 법으로 제한하자는 입장인 반면,민주노총은 사람마다 치료기간이 다르므로 기간을 규정해선 안된다는 요지다. 지금은 요양기간이 노동자가 최초로 방문한 의사(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좌우된다. 이렇다보니 노동자편에 우호적인 의사들이 공단과 사측으로부터 갖가지 압력을 받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 노조 관계자는 '노조원의 근골격계질환에 적극적이었던 모대학병원 의사가 공단과 사측으로부터 항의 공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사측은 기업생산성 차질이니,병원을 옮기겠다느니 하며 노골적으로 협박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동아대병원 김정일 교수는 '근골격계질환은 조기치료를 하면 사회적 비용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만성화될 때까지 방치하기보다는 작업환경조사를 철저히 하고 직업병 인정기준을 넓히고 승인여부를 신속히 처리하는 등의 보건정책이 검토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임태섭기자 tslim@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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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대우조선,7월 한라공조,2003년 1월 삼호중공업,4월 현대자동차,5월 INI스틸,2004년 3월 서울지하철공사,5월 경북대병원 ….
사업장 곳곳에서 근골격계질환 실태가 폭로되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은 근골격계질환은 1996년 506건→2000년 814건→2002년 1천827건→2003년 4천532건으로 늘었다. 7년만에 8배를 웃도는,가히 폭발적이라 부를만한 증가세다.

올초 부산대병원 강동묵 교수가 영남지역 한 자동차부품업체를 면접조사한 결과는 더욱 심각하다. 노동자 400여명 중 57%가 근골격계증상을 호소하는 유소견자로 나타났다. 한 업체에서만 10명 중 6명이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태인 것이다.

근골격계질환은 어떤 질환일까. 뼈,근육,인대,힘줄,힘줄막,윤활낭과 신경 등 근골격계에 장애가 나타나는 질환을 말한다. 증상으로는 통증,쑤시는 느낌,뻣뻣함,화끈거리는 느낌,무감각 또는 찌릿찌릿함 등이 있다.

근골격계질환의 특성은 초기에 적절한 치료와 휴식을 취하면 정상으로 돌아오는 가역성을 띠지만,만성화되면 치명적인 노동력 상실로 이어진다는데 있다. 그래서 조기발견이 중요한 것이다.

작업관련 근골격계질환의 원인은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다음의 5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자 개인 특성 △노동조건 △작업방법 등 인간공학적 특성 △직무스트레스 △생산속도와 작업방식 변화 등 사회적 요인이 그것이다.

신체부위별로 흔하게 나타나는 근골격계질환을 보면 이렇다. 근막통증후군,경추부염좌,추간판탈출증(이상 목쪽),근막통증후군,회전근개염,건염,견관절 염좌(이상 어깨쪽),외상과염,요골신경 포착 척골관 증후군(이상 팔꿈치쪽),염좌,건초염,수근관증후군,수지진동증후군(이상 손목쪽),요추부염좌,추간판탈출증,디스크내장증(이상 허리쪽),측부 인대파열,인대염좌,관절염,슬개골 건염(이상 무릎쪽). 임태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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