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건설 노동자의 죽음

호주 멜버른 씨티링크 건설 노동자의 비극적 죽음

(WSWS.org에서 옮기고 약간 줄임)
1999년 9월 16일, 피터 바이언

케넷(호주 빅토리아 주지사) 정부 말을 빌자면 새로 건설하는 씨티링크 유료도로는 "빅토리아주의 전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 될거라 했다. 주 당국이 성대한 팡파레와 함께 8월 15일에 20억 달러의 민영 도로 프로젝트가 시작한지 며칠 뒤에는 빅토리아주의 조기 선거가 공포되었다.

그러나 유로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어난 두 젊은 노동자의 죽음은, 그 요란법석의 배후에 숨겨진 현실을 경고하고 있다. 씨티링크 운영자는 죽은 노동자들의 동료들이 느낄 비통함에 양보하는 의미에서 다음번에 지하터널이 개통되면 죽은 노동자 한명이 소유하고있던 자동차를 최초로 달리게 하겠다고 선언했다.(개뿔!)

28세의 저스틴 오코너와 21세의 아담 도어티는 안전하지 않은 노동 조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제 이런 노동조건은 모든 산업에 걸쳐 만연해있다. 올해까지 빅토리아주 건설 현장에서 10명의 노동자가 죽음을 당했고, 작년에는 16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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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모두 씨티링크 건설수주업체인 내셔널 파일이라는 회사에 고용되었다. 이 회사는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기 위한 9미터 깊이의 구멍 50개를 굴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1997년 5월 12일, 저스틴 오코너는 굴착기를 닦다가 그만 뒤에 있던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이 구덩이에는 안전 시설이 없었고 2.4미터 깊이에 지름이 75센티미터 정도였다. 그는 앉은 자세로 떨어져서 구덩이 바닥에 주머니칼처럼 (다리가 머리 위로 겹쳐지는 자세로) 있게 되었다. 당시 의식이 명료하였고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머리와 손은 흙에 파묻히지 않았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의 동료 노동자가 그를 꺼내기 위해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지만, 현장내 응급조치 과정에 따르느라 더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굴착 작업으로 파낸 흙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덩이 가장자리는 허물어져내리기 쉬웠다. 이미 오코너의 머리 위로 상당량의 흙이 쏟아져내린 상태였다. 구조대원은 그를 생매장하게 될까봐 구덩이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다.

소방관과 응급구조사를 불렀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구해본 경험이 풍부한 응급구조사가 구덩이 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오코너에게 밧줄을 매달아 끌어내자고 제안했지만, 부상이 발생하게 될 우려가 있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소방대원의 구조훈련에 사용하기 위해 비디오촬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이번 구조과정이 교과서적인 성공적 구조가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비디오는 검시장에서 상영되었다. 여기에는 구덩이 바닥에 갇힌 오코너와 구조대원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오코너는 구덩이 속에 물이 차오르고 있다고 총 11회에 걸쳐서 말했다.

구조대원 ; 아니예요, 우리 눈에는 물이 안보이는데요. 당신 옷 같은 데에 약간 습기가 배어서 그런 거예요. 조금 새어나오는 정도이고, 그게 다예요, 걱정할 거 없어요.

오코너 ; 머리까지 차고 있어요.

구조대원 ; 저스틴,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거예요. 지금은 썰물 때라구요.

오코너 ; 귀에 물이 차고 있는 게 느껴진단 말이예요.

구조대원 ; 저스틴, 귀속에 먼지가 들어간 거예요.

오코너 ; 아니예요, 귀에 액체가 들어있어요.

구조대원 ; 감각이 조금 무디어지고 있기 때문에 약간 얼얼한 느낌이 들 수도 있어요. 물이 느껴진다고 하셨지요?

오코너 ; 내 귀에...

구조대원 ; 아니, 당신 말이 맞아요. 몇분만 있으면 우리가 꺼내줄께요.

오코너 ; 이 물들이 다 어디서 온 건가요?

동료노동자 ; 아니, 지금 오코너가 물에 잠기고 있잖아요.

구조대원 ; 물이 약간 새어드는 것 뿐이예요. 걱정할 것 없다구요.

오코너의 마지막 말 ; 물이... 물이...

구조대원 ; 알았어요, 물에 대해 맘을 편하게 가지세요 저스틴. 제어할 수 있다구요.

구조작업은 2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마침내 구덩이 밖으로 꺼내지기 전에 최소한 5분 이상 오코너는 물과 진흙으로 덮여있었다. 그는 부분적으로 회생하여 병원에서 5일간 입원해있다가 1997년 5월 17일에 사망하였다. 사망원인은 '익사'였다.

오코너의 동료인 안드레 눈난은 굴착장비 운전수였다. 검시장에서 그는 사고 며칠 전에 현장 관리자인 애쉴리 윌리암스에게 문제를 제기했노라고 증언했다. 그는 작업현장에 쌓인 흙때문에 위험하다고 호소하였다. 눈난은 "그러자 애쉴리가 날 보고 웃더니 나가버리더군요"라고 회상했다.

현장 관리자(애쉴리 윌리암스)는 사고당일 구조 책임자였던 소방관에게도 현장에 물과 관련된 위험은 전혀 없다고 조언했다. 검시장에서 윌리암스는 그 충고가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다들 흙이 더 무너져내리는 일을 더 먼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굴착기가 수도 파이프 하나를 부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파이프는 작업장으로부터 불과 5미터 거리에 있었다. 또 다른 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굴착 작업을 하던 구멍이 강 바닥보다 낮아서 구덩이 속의 물을 퍼내기 위해 펌프가 필요했다고 한다.

구조 책임자는 물이 오코너의 콧속으로 들어오기 39초 전에서야 비로소 구덩이 속에 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배수펌프를 가지고 왔지만 즉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펌프를 가동시킬 수 있었지만 오코너의 얼굴에서 진흙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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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티의 자살

판단착오와 불행이 우연히 겹친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은, 사실은 노동조건과 현장의 안전이 점점 파괴되어온 결과물인 동시에 건설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저항의 문화가 타락해온 결과물이었다. 오코너가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본 동료 노동자들이 느낀 절망과 분노는 도어티의 자살 결정을 통해 잘 나타난다.

젊은 아담 도어티는 내셔널 파일 사장의 아들이었고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오코너처럼 그도 건설벌목탄광노동조합(CFMEU)의 조합원이었다. 1996년에 도어티는 회사측과 노조측의 대표자로 구성된 현장 안전위원으로 선출되어 5일 내내 산업안전보건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씨티링크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도어티는 현장 관리업체인 트린스필드 오바야쉬 회사에 현장의 안전문제를 끊임없이 호소해왔다. 오코너가 사망하기 전부터 그는 구덩이를 파고나서 누군가가 빠지지 않도록 표면 높이까지 모래를 덮어두지 않는 것에 대해 오바야쉬 측에 문제를 제기했다. 구덩이를 다시 메워놓는 이런 작업은 내셔널 파일 회사의 설계서에도 나와있는 부분이지만 오바야쉬는 이를 무시해왔다.

오코너의 사고가 발생하던 날, 도어티는 그 장면을 처음 발견한 사람 중 하나였다. 도어티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구조를 도왔을 뿐 아니라, 물이 차오른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다른 노동자와 함께 정원용 호스를 가지러 달려나갔다. 하지만 구덩이 속에 물이 찰 수도 있다는 것을 구조대원들이 몰랐기 때문에, 오코너가 그 호스를 통해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자는 그들의 제안은 거부 혹은 무시당했던 것이다.

오코너가 죽고 나서, 도어티는 안전 위원회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트랜스필드 오바야쉬 회사는 그의 주장을 묵살했다. 회사는 노동자들이 반복적인 재해를 당할 때만이 안전 조치를 이행할 뿐이었다. 몇 주일이 지난 뒤, 도어티는 현장 안전 위원회를 사임했다.

오코너 사망 2개월 뒤, 도어티는 한적한 수풀 지대로 차를 몰고 나가서 배기가스 파이프를 연결하여 자살했다. 그의 시신 옆좌석에는 씨티 링크 현장의 안전 문제에 대해 직접 작성한 세장의 노트가 놓여있었다.

손으로 쓴 그 노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차사고의 보고... 질 관리 부족... 적절한 관리시스템의 부재...사고발생시 누구도 올바른 대처를 하지 못함... 요점은 사후안전조치도 안된다는 것... PTC라인(전기선) 2미터 이내에서 작업하였고... 모든 경우에 있어서 노동자는 보이지 않고... 위험 평가가 없고..." 등이었다.

'선데이 에이지'의 리포터가 도어티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트랜스필드 오바야쉬와 접촉하여 현장 안전문제에 대해 취재하였다. 사측 대변인은 도어티의 죽음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한편, "우리는 언제나 전국 최고로 평가되어왔으며 씨티 링크의 이번 사업은 성공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1998년 5월 멜버른 행정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트랜스필드 오바야쉬사와 내셔널 파일사는 모두 위험 작업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벌금 2만 5천달러가 선고되었다. 또다른 민사 소송을 통해 오코너의 가족들은 비공개된 액수의 보상을 받았다. 화해금의 30%는 트랜스필드 오바야쉬에서, 70%는 내셔널 파일에서 지불하였다.

산재사망 보조 및 협력 모임의 대변인인 엘리자베스 모베이압은 "빅토리아 주에서 산재 사망 보상금은 2만달러에서 2만 5천 달러 정도이다. 이건 평균이지만, 최근 통계를 보면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나와라 회사에 고용된 한 젊은 노동자는 기둥을 세울 구덩이를 파는 작업 도중에 협착되어 사망했는데, 법원은 회사에 유죄판결을 내리지 않고 250달러의 벌금만을 물었다"고 말했다.

검시관은 아담 도어티의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본인이 책임을 질 부분(자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현장 관리자와 담합하여 산재를 당한 노동자에게 오히려 왜 안전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냐고 비난해온 노조를 고발하는 것이자, 정부와 경영자, 노동조합이 함께 조장해온 문화를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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