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날개 단 '침묵의 살인자'…피해자 눈물 외면하는 정부

날개 단 '침묵의 살인자'…피해자 눈물 외면하는 정부
석면 피해 노동자 "정부가 석면 질환자 요양 치료 보장해야"
2009-07-06

"정부는 석면 질환 대책을 즉각 마련하라!"

구호가 채 끝나기 전에 연달아 기침이 터졌다.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1급 발암 물질, 석면으로 인해 병에 걸린 환자 24명의 힘겨운 외침이었다.

전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부산석면추방공동대책위원회는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종합청사 앞 인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석면 피해 노동자에게 적절한 치료와 요양 관리를 제공할 수 있는 산업재해 판정 기준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부산의 석면방직공장에서 일하다 석면폐증을 앓게 된 노동자 17명은 2007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에 걸쳐 근로보험공단에 요양 관리를 신청했다. 석면폐증은 고농도의 석면섬유를 들이마셔 폐 조직이 굳어가는 병이다. 석면폐증을 비롯한 석면 질환은 치료가 불가능하며 증상이 악화되지 않도록 요양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7명 중 요양 지원을 받은 이는 1명에 불과했다. 석면폐증 환자라고 하더라도 산재 판정 기준에서 합병증을 보여야만 요양 관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9명은 11급에서 13급 사이의 장해등급 대상자로 분류됐다. 나머지 7명은 '석면폐증이 의심된다'는 정도의 '석면폐의증'으로 분류돼 산재 적용을 받지 못했다.

정현정 부산환경운동연합 간사는 "장해 13급은 작업 중 손가락을 잃은 정도의 상해에 적용되며 99일치의 급여를 제공받는 것에 그친다. 11급이라고 해도 220일치 급여만 받는데 그친다"며 "일도 못할 정도로 병들고 생계비도 막막한 석면 피해 환자들이 살아가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보상액수"라고 말했다.

"석면 질환 산재 판정, 제대로 된 기준조차 없어"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판정 결과를 두고 "산재 판정 기준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영구 전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회장은 "2006년까지만 해도 석면 질환으로 산재 신청을 한 사람은 요양 관리를 받을 수 있었는데 2007년 말경에 피해자 모임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제대로 된 조치가 내려지지 않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들은 "산재보험법에서 인정하는 석면관련 질환은 폐암, 석면의증, 악성중피종(흉막이나 복막 등의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분열해 암을 유발하는 증세)만 포함돼 있고 다른 증상은 고려하지 않는다"면서 "이는 석면 질환의 증상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이들은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이 석면 질환에 맞는 산재 판정 기준 마련해 적정한 요양 관리를 제공 받으려는 피해자의 요구를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장해등급을 내렸다"면서 "판정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석면 질환이 폐암으로 번질 확률, 진폐증보다 높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산재보험에서) 석면 질환을 적용할 때 적용하는 진폐법은 1984년 탄광 노동자들을 위해 마련된 기준"이라며 "석면 질환은 폐암으로 번질 확률이 일반 진폐증보다 훨씬 높다"고 산재 판정 기준의 부적절성을 지적했다.

또 백 교수는 "이런 증상은 엑스레이(X-ray) 촬영에서는 발견하지 못하고 컴퓨터 단층 촬영 등을 통해 재해 여부를 판정해야 하는데 근로복지공단에서 이런 준비를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기수 건설노동조합 정책기획실장은 "일본이나 영국에서는 석면 질환에 대한 보상을 이미 실시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우리나라는 200만 건설 노동자 중 석면질환 자체로 인한 산재 보상은 1건도 없다"고 말했다. 유 실장은 "2003년까지 국내에서 사용된 석면이 65만 톤(t)인데 170 톤당 1명의 환자가 발생한다고 한다. 알려지지 않는 수천 명의 환자가 있는 격"이라면서 정부가 실태 파악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주최 측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근로복지공단에 장해등급 판정에 불응한 9명의 심사청구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 관계자와 면담을 갖고 △석면 피해 적용 증상 확대 △석면 질환 판정 기준 통합 △근거리 의료기관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 보장 △공청회 등을 통한 석면 피해자 의견 반영 등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김봉규 기자,최형락 기자
한노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