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4.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 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아웅틴툰 이야기 / 2018.01

일터기사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 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아웅틴툰 이야기

박유호 <담> 프로젝트, 노동당

아웅틴툰씨는 미얀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94년 18세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때였습니다. 당시 미얀마의 정치상황이 좋지 않아 대학에 진학 할 수 없는 그는 외국으로 견문도 쌓고 공부도 하고 싶어 ‘산업연수생’제도를 신청하여 한국에 들어왔다고 합니다.그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 견문도 넓히고 배울 기회가 많아지겠다며 기대를 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이었습니다.

“‘산업연수생’ 이름만 듣곤 막 이것저것 대접 받으며 공부하며 일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기대는 금방 깨졌어요. 이렇다 할 한국어 교육도 없이 3일 정도 딱 교육하고 나서, 바로 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는 한국에 들어오자 마자 인천 제물포 인근의 한 선박엔진 주물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막상 한국에 들어와서는 배우는 시간이 있기는 커녕 쉬는 시간조차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노동시간은 하루 12시간을 넘는게 당연했고, 주말도 없었습니다. 잠자리 또한 비가새고 좁아서 휴식을 취하기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기대’는 이내 ‘실망’이 되었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장시간 노동시간과 열악한 노동환경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의 차별 또한 무시 못했습니다.

“한국말이 서투니 한국인 직원들이 기분 나쁜 장난을 많이 쳤어요.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한국인 직원들이 한국어를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나쁜말(상대방을 비하하는 말이나, 욕설 등)을 해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한국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니니까, 이게 해야 할 말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어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나 어투를 보며 분간을 해야 하니까 이래저래 눈치보는 법부터 배우게 되었어요.”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한국어’에 서툴다는 이유로 무시받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1년정도 일을 하다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노동을 하다가 입은 부상인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산재신청을 거부 당했습니다. 산재신청을 알아보면서 이주노동운동을 하는 동료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노동법을 배우고 동료들의 노동상담을 해주면서 그는 지금까지 이주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 중에서 그는 ‘2003년’ 이주노동자들의 집단 농성과 투쟁의 경험들을 자랑스레 이야기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지금 한국땅에서 이주민 영화제를 몇 년째 진행하고 있고이주민방송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주민 방송 3년, 다른 데에서도 방송 일을 3년정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미얀마에서 한국의 EBS같은 교육방송사를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해요. 성인 청소년아이들 모두를 위한 교육방송을 만들고 싶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인들이 쉼 없이 살아가는 이유를 궁금해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자기가 일하면서 보았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찾기보다는 무엇에쫓겨 사는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너무 여유롭지 못하게 사는 것 같아요. 너무 잘사는 미국이나 유럽만 쳐다보고 사는데 부족하지만 여유롭게 살아가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삶도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그가 살았던 미얀마에서는 사람들이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한국사람들에게 보고 배울게 많지만 여유롭게 사는 법은 미얀마사람들에게 좀 배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장시간 노동을 없애려는 고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긴 노동시간과 열악한 환경은 계속되고있습니다. 우리에겐 여유로운 삶이란 굉장히 멀어져 보입니다. 하지만 아웅틴툰씨는 간단합니다. 좀 더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시간을 겪어오면서도 활기차고 여유롭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제게도 새로이 힘이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8일터기사

특집3.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오쟈 씨 이야기 / 2018.01

일터기사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오쟈 씨 이야기

푸우씨 <담> 프로젝트, 상임활동가

“고향 친구들 모두 한국에 왔어요. 다 여기 있어요, 한국에. 네팔에서 가족 중 한 명이 E-9 비자로 한국에 와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다른 가족 모두가 살수 있거든요.”

태어나 자란 네팔을 떠나는 것,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하는 것은 오쟈 씨와 또래의 네팔 청년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오쟈 씨는 한국에 오기 전 ‘필더보이’로 인도에서 일 했다. 회사의 지시에 따라 사무실로 서류나 돈, 책을 준비해 오토바이로 전달하는 일을 했다. 열심히 일했지만, 한 달 꼬박 일하고 받는 월급은 한국 돈으로 20만 원, 많을 때는 25만 원 남짓한 수준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인도에 갔지만, 네팔과 별반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것을 알게 된 그는 고향에 돌아와 친구들처럼 한국행을 택했다.

“5명이 한방에 자야 했어요. 기숙사 비용도 내야 했고요. 월급에서 10만 원씩 잘라갔어요. 하숙비, 전기비, 인터넷비. 이렇게 해서 1인당 10만 원씩 기숙사비용으로 잘랐어요.”

인도에서 네팔로 돌아와 카트만두에서 6개월가량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해 운 좋게 한국에 오게 된 오쟈 씨. 그는 인천 서구의 와이어 커팅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한국생활과 달리 현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눕기에도 빠듯하고, 화장실도 없는 컨테이너에서의 생활이었다.

“회사에 가서 부장님한테,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하니까 ‘안녕하세요 하지마. 안녕하십니까! 이렇게해’ 라고 하더라고요.”

그는 한국에서 첫 출근길에 곤욕을 치렀다. 출근하며 인사를 건넨 오쟈 씨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잘라먹은 한국인 부장은, 출근할 때고개를 숙이고 다니라고, 눈을 깔고 다니라고 말했다. 심지어 사장과 부인은 오쟈 씨의 인사도 받지 않았다.

“네팔에서 오자마자 한 달 동안 매일 같이 욕먹고, 맞고 그랬어요. ‘시발’, ‘이 새끼야’ 이런 욕을 했어요.”

업무지시를 하는 부장은 매일 같이 욕을 했고, 때로는 폭행도 가했다. 일도 많이 힘들었다. 그가 맡은 업무는 운반이었다. 60~70kg가량의 와이어 뭉치를 혼자서 들어 날랐다. 고된 업무로 1년 정도 지나자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허리가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에 가서 얘기했죠. 몸이 아프다고요. 회사를 옮겨 달라고요. 그러자 회사에 선 ‘일해! 일 안 할 거면 네팔 가!’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오쟈 씨는 넉 달 가까이 악몽 같은 일상을 보냈다. 출근한 그에게 부장은 아프냐고 묻곤, 아프다고 답하면, ‘일 없어! 가서 쉬어!’라고 하며 그를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때론 아무 의미 없이 무거운 재료를 이곳저곳으로 들어 나르도록 시켰고, 어떤 때는 2시간만 일을 시키고는 일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그가 아프다고 하니 회사에선 컨테이너가 아닌 다른 기숙사(아파트)로 그를 보냈다. 그리고는 월급에서 20만 원을 기숙사비로 잘라갔다. 결국,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쟈씨는 스스로 노동부를 찾았지만, 노동부 직원은 모르겠다며, 사장에게 말해서 사업장을 변경하라고 했다. 도움은 커녕,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부 직원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이주노조였다. 우연히 친구에게 건네받은 전화로 이주노조 위원장(네팔에서 온 우다야 라이)에게 사정을 말한 그는, 14개월 만에 사업장을 변경했다.

“평택에서 일하던 회사, 사장님도, 부장님도 안 좋은 사람이었어요. 회사에선 ‘네팔로 돌아가고 싶냐, 말 안 들으면 비자 연장 안 해줘!’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오쟈 씨는 우여곡절 끝에 안성·평택에 있는 플라스틱 사출 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농촌에 있는 공장에서 오쟈 씨와 동료들은 일이 없을 때는, 회사 밖의 농장에 불려가 풀을 베야 했다. 정해진 업무가 아닌 다른 일을 시키는 것에 대해 묻자, 회사에선 ‘시키는 대로 해!’라고 답했다. 3년 시효의 비자가 만료되면, 1년 10개월을 연장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고용허가제’의 비자 연장을 미끼로 회사에서는 부당한 일을 강요했다. 12개월이 넘게 일하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11개월짜리 계약서를 쓰도록 강요하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공장의 다른 부서로 재계약을 맺게 하는 꼼수를 쓰는 회사였다. 오쟈 씨는 또 한 번 이주노조의 도움을 받아 사업장을 변경했다. 그렇게 지금 일하는 천안의 볼트·너트 제조회사에 터를 잡았다.

‘사장님’의 허락 없이는 사업장 변경이 불가능하고,‘사장님’이 3년을 근무한 이후 비자 연장을 해주지 않으면 더 일하고 싶어도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재의 고용허가제의 부당함을 몸소 느낀 오쟈 씨는 이주노조의 활동과 고용허가제 폐지를 촉구하는 행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고용허가제를 해결하지 않고 선 그에게 기대고 있는 가족들의 삶도 보장이 되지않기 때문에, 오쟈 씨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이주노조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오쟈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한국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많은 이주노동자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대로면 충분한가. 정말 그런가. 계속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50일터기사

특집2. 쑤쑤!1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요! – 여성 이주노동자 스레이나 이야기 / 2018.01

일터기사

쑤쑤!¹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요!

– 여성 이주노동자 스레이나 이야기

정지윤 <담> 프로젝트, 수원이주민센터

스레이나 씨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는 열두 살이 되던 때부터 항상 일하여 돈을 벌어야했다. 어머니를 도와 길거리에서 행상했고 열여덟 살이 되어서는 음식점의 종업원으로 일했다. 하루 1달러, 한 달 20달러의 월급은 동생들의 학비이자 엄마의 병원비이자 가족들의 생활비였다. 월급을 좀 더 많이 받기 위해 그녀는 남들이 꺼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맥주 파는 일을 하면 월급이 40달러나 됐어요. 하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술 파는 여자는 술만 파는게 아니라 다른 안 좋은 일도 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멸시해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알지만 내가 진짜 그런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가족을 위해서, 내 일이기 때문에 떳떳하게 일했어요.”

스레이나 씨는 열여덟 살의 어느 날 부모님께도 말하지 않은 채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으로 떠났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그곳 음식점에서 숙식하며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늦게 알게 된 아버지는 스레이나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프놈펜까지 찾아 왔지만, 그녀는 병든 어머니와 일곱 명의 동생이 있는 어려운 집안형편을 아버지 혼자 감당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매몰차게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낯선 대도시에서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지 쉼없이 일했다. 음식점일 뿐만 아니라 3층짜리 가게를 새로 짓느라 벽돌과 시멘트를 나르는 일까지 사장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만 했다. 

숙식을 조건으로 한 달 20달러 월급을 받고 시작했던 프놈펜 식당, 13년을 일한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은 100달러였다. 한국행은 그녀에게 13년간 일한 식당에서 받던 월급 100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벌 새로운 기회였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한 한국은 상상과는 사뭇 달랐다. 

“6시부터 12시까지 일을 하고 밥을 먹는다고 계약했는데 1시까지 일을 하고 밥을 먹었고 밥 먹자마자 바로 일을 했기 때문에 점심시간 한 시간 쉬기로 한 건 어떻게 계산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일을 시키는 만큼 돈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지만, 한국 온 지 얼마 안 돼서 물어볼 수도 없었고 계속 일만 했죠.”

핸드폰도 없이 왕복 3시간을 걸어 나와야 마트가 나오는 시골, 비닐하우스로 둘러싸인 곳에서 충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스레이나 씨는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을 했다.

“사장님을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노동부에 가서 얘길 했어요. 한국에서는 노동부에 가서 신고를 해봤자 바로 이길 수는 없어요.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노동부에 갔었는데 그때마다 노동부에서는 자꾸 사장님이랑 화해하라고 자꾸 그렇게만 얘기했어요…(중략)…. 한 번은 사장님이 일하는 시간이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였던 걸 6시부터 7시까지 하라고 노동 시간을 바꿨어요. 사장님 말은 겨울에는 일이 적어서 아침 9시에 시작해서 5시에 끝나니까 그때일 안 하는 시간만큼 지금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그대로 일했어요. 10월 중순쯤 되니까 시골이니까 어둡고 추워요. 그때는 그럼 사장님 말대로 9시 시작해서 5시에 끝나야 하는데 그때도 6시에서 7시까지 똑같이 일했어요..”

스레이나 씨처럼 농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63조의 예외규정에 의해 추가 근로수당이나 휴일 보장을 받지 못한다. 수많은 농업 종사 이주노동자들은 한 달에 겨우 하루나 이틀을 쉬고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다. 게다가 어떤 사업주들은 초과근로 수당은 고사하고 초과근로 시간에 대한 최저임금조차 주지 않은채 60시간을 일하건 70시간을 일하건 주 40시간 기준의 최저임금만을 지급하기도 한다. 이런 척박한 한국의 노동 환경 속에서도 여성 이주노동자 스레이나 씨는 순응하고 무릎 꿇지만은 않았다.

“처음에 농장에서 무작정 나온 뒤부터 크메르노동권협회를 알게 돼서 관계를 맺고 같이 일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가장 중요한 일들은 협회 일이에요…(중략)…선생님은 한국 사람이고 나는 캄보디아 사람이에요. 한국 선생님 있지만, 캄보디아 사람인 내가 있으면 캄보디아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더 잘 할 수 있어요,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증거 자료를 모으고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 설명해 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중요해요.”

E-9² 비자가 만료된 뒤 한국어를 공부하는 D-4³ 비자로 한국에 다시 들어온 스레이나 씨는 여전히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한국어를 배우며 크메르노동권협회를 대표하여 노동자들을 돕고 한국의 잘못된 고용허가제와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녀의 삶의 이야기는 ‘여성 이주노동자’로만 규정할 수 없다. 매 순간 땀 흘려 일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그 평범함이 그래서 더욱 특별할지도 모른다.

* 각주

1) 캄보디아 말로 힘내라, 파이팅이라는 뜻이다.

2) 비전문취업비자, 고용허가제

3) 일반연수비자

31일터기사

특집1. ‘담을 허물다’를 시작하며 / 2018.01

일터기사

‘담을 허물다’를 시작하며

사월 <담> 프로젝트,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제7의 인간: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여전히 죽음으로 호명되며

2016년 겨울을 환히 밝혀주었던 빛은 크고 작은 변화들로 일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정의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었던 촛불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열망하는 촛불로 이어졌습니다. 변화가 시작되었던 그곳, 광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날의 목소리는 변화를 일구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시작되었음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변화의 길목에서 함께 불을 밝혔지만 이름이 아니라 죽음으로, 숫자로 불립니다. 올해도 몇 번을 새하얀 국화꽃을 놓으며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산업재해나 사고, 강제추방과 단속, 신변 위협으로 인한 자살, 젠더폭력 등으로 많은 이주민이 망했습니다.

집이 된 비닐하우스, 빗물이 새서 전기가 흐르는 벽, 잠기지 않는 방, 휴식시간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생산량을 위해 제거되는 안전장치는 이주민에게 닥친 한국사회의 잔혹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기에

“가난한 나라에서 왔지?” “이상한 냄새 나.” “말귀를 못 알아들어” “답답하게 굴어” “힘든 일 하러 온 건데. 뭐 어때”… 쌓인 담 너머 사람이 있습니다. 더 늦출 수 없을 만큼 울부짖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차별의 시선을 혐오의 언어를 맨몸으로 받아내며 가해지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울부짖고 있습니다. 울부짖는 그 사람들의 곁에 머물며 안부를 묻고 삶에 말을 건네려 합니다. 그 사람들도 나도 사람이기에. 이보다 더 마땅한 이유가 필요할까요? 그저 우리는 같은 사람이기에.

당신의 목소리를 ‘담’아, 높게 쌓인 ‘담’을 무너뜨리고

어느새 높다랗게 쌓인 회색빛 ‘담’은 목을 뒤로 젖혀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회가 나눈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흐트러뜨리고 그 사람들에게 붙인 부정적인 이름들을 떼어내려 합니다. 가난하고, 냄새나는, 답답한 사람이라는 편견과 낙인을 떼어내고 개개인의 이야기를 건져 올리려고 합니다.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삶에 문을 두드리고 말을 건네어,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으려 합니다. 오가는 이야기는 오롯이 기록되어 높게 쌓인 담에 균열을 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록된 이야기는 꺼칠꺼칠하고 차가운 담을 흔들 것입니다. 사회가 붙여놓았던 이름들은 오롯이 한 사람의 이름으로, 삶으로 불릴 것입니다. 집단이 아닌 한 사람으로 불리고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이야기될 때, 더욱 평등해지지 않을까요?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본다면 누군가를 담 너머로 밀어내지 않고, 이쪽과 저쪽을 나누어 벽을 쌓지 않을 테니까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며

경기이주공대위는 변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이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이주민구술생애사 프로젝트<담>은 이러한 고민 끝에 꾸려진 기획단입니다. <담> 기획단은 이주민들이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기억되고, 혐오와 차별로 뭉뚱그려진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소망하며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담> 기획단은 여성 이주노동자 스레이나 씨, 북한이탈주민 김복주 씨, 이주노동자 오쟈 씨, 이주청소년 황윤호 씨, 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아웅틴툰 씨, 종교적 난민신청자 ‘A’ 씨, 귀국 이주노동자 날라끄 씨 7명의 이주민을 만나서 삶에 말을 건넸습니다. 그 사람들이 전해오는 삶의 이야기를 빼거나 보태지 않고 오롯이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하나의 역사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삶의 목소리가 사회에 가닿아 지기를 바랍니다. 이주민의 목소리가, 목소리를 통해 울리는 마음들이 모여 높게 쌓인 담에 균열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직은 균열이 일어날 ‘그 날’이 낯설지만 새로운 세상을 마음껏 상상하며 한 걸음씩 내딛겠습니다.

한걸음에 다가감이, 다음 한 걸음에는 소통이, 그다음 한 걸음에는 울림이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그 사람들의 삶이 오롯이 이야기되는 그 날을 향해 함께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34일터기사

[언론보도] 타인의 일에 대해 안다는 것 (매일노동뉴스)

기고

타인의 일에 대해 안다는 것

기사승인 2018.01.11  08:00:01

“목이 너무 아픈데 이것도 산재인가요?” 몇 년 전 한 병원에서 ‘노동자 건강권’과 관련한 강의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던 중 다가온 간호사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병동에서 일을 하는데, 업무전화를 하면서 환자차트 등에 관련기록을 기입하다 보니 목과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끼운 채 통화하게 되고, 이것이 빈번해지자 경추 디스크탈출 초기증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업무상 불안정한 자세가 반복되는 것이니 산재 가능성이 매우 높고, 작업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답했다. 사실 작업방법을 바꾸는 것은 간단한 것인데, 업무전화를 안 받을 수 없는지라 송·수신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설치하면 비용도 저렴하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http://m.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106

26기고

프로젝트 참여자를 기다립니다

공지사항



<일터 24시> 프로젝트 참여자를 기다립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하는 사람들의 일터와 노동과정을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고자 합니다.

영상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알아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점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촬영은 출근부터 퇴근까지 24시간 진행하고, 별도로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일터 24시 프로젝트에 함께해주실 분들을 기다립니다.

고맙습니다.


* 문의 

: 미디어뻐꾹 (https://www.facebook.com/xxnnn21/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재현(02-324-8633)

32공지사항

[언론보도] 이주민 구술 생애사 ‘담’ 프로젝트를 아시나요? (미디어스)

기고

이주민 구술 생애사 ‘담’ 프로젝트를 아시나요?[2주에 한번, 이주이야기] 이주민 구술생애사 <담을 허물다> 발간기념 토크콘서트
한국에는 다양한 체류 자격을 가진 이주민들이 대략 200만 명 넘게 살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광주시를 제외한 전라남도의 인구가 179만 명임을 감안할 때, 정말 많은 숫자의 이주민들이 한국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이주민 혹은 이주노동자를 떠올렸을 때의 그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해내고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소중한 책 한 권이 있다. 이주민 구술생애사 담 프로젝트 <담을 허물다>가 바로 그 책이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749

27기고

[언론보도] [‘이주민 생애사’ 연재④]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오쟈 이야기… “그건 선택이 아니었다“

기고

네팔인 오쟈씨가 “박근혜 퇴진”을 외친 이유

[‘이주민 생애사’ 연재④]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오쟈 이야기… “그건 선택이 아니었다“

푸우씨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가 media@mediatoday.co.kr  2018년 01월 07일 일요일


“한국에 이주노조 활동하러 오신 분 같다니까요.” 오쟈 씨에 대해 이주노조 사무차장인 한국인 활동가는 그렇게 말했다. 최근 이주노조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하고 있는 조합원이라고.

오쟈 씨와 인터뷰를 하기 전 여러 곳에서 그와 마주쳤다. 일요일, 이주노조 관련 활동을 하는 자리였다. 그는 매번 그 자리에 있었다. 낯선 이들에게 선뜻 건네기 쉽지 않은 유인물과 플랜카드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많은 인파속에 그가 서 있었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0652#csidx4c54a3304421fc7a4a05f7a5f0e8522

27기고

[언론보도] [‘이주민 생애사’ 연재③] 북한이탈주민 김복주 이야기… “난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미디어오늘)

기고

“뿔 달린 김정일? 한국사람들 정말 다 그렇게 배우나요?”

[‘이주민 생애사’ 연재③] 북한이탈주민 김복주 이야기… “난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정재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가 media@mediatoday.co.kr  2018년 01월 05일 금요일

인터뷰를 위해 김복주 님이 단장으로 있는 한국평화통일예술단을 찾아갔다. 예술단 연습실에서 만난 김복주 님은 화려했고 아름다웠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트로트 가수라 그런지 달라도 뭔가 달랐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북한이탈주민이 겪었을 법한 우여곡절과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는데, 김복주 님이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는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시대의 아픔은 김복주 님에게 살려면 죽기를 각오하고 강을 건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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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사고·통계·지표, 드러내야 바꿀 수 있다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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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사고·통계·지표, 드러내야 바꿀 수 있다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 류현철
  • 승인 2018.01.04 08:00

2018년 새해가 밝았다. 12월31일에 뜬 해와 1월1일에 뜬 해가 다를 리 없으나 사람들은 매년 첫날이면 새로운 기대를 품고, 변화를 위한 자신과의 약속 실천의 시작점으로 삼곤 한다. 동기부여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다짐과 계획과 마찬가지로 정책이나 제도 역시 그 시점(始點)을 매해 첫날로 잡는 경우가 많다. 달력을 기준으로 하는 행정상 편의가 목적이겠으나, 새해이기에 새로운 제도의 등장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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