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2026 10월 노동자정신건강돋보기]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 탓이지!

일터기사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 탓이지!

[노동자정신건강돋보기] <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조애나 치크, 심심, 2026)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배우자를 잃은 임신부 의뢰인이 찾아왔다. 상담을 마무리하며 나는 개인사를 조심스레 꺼냈다. “과거 표현으로 저 역시 유복자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홀로 오 남매를 키워내셨지요. 그러니 내년에 태어날 아이를 분명 훌륭히 키워내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남들보다 감정의 진폭이 크고 눈물이 많은 것은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고통과 트라우마가 세대를 거쳐 내게 전이된 결과가 아닐지 짐작해 본 적이 많았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방대한 분량의 저서 <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은 정신과 전문의이자 심리치료사, 명상 강사인 조애나 치크(Joanna Cheek)의 노작이다. 다루는 스펙트럼이 넓어 단숨에 요약하기는 쉽지 않지만,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매우 뚜렷하다. 원제인 “It’s Not You, It’s the World(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 탓이지)”는 이러한 저자의 핵심 시각을 명징하게 대변한다.

사회적·역사적 문제로서의 트라우마

이 책에서 저자는 트라우마의 범주를 전쟁이나 끔찍한 재난 같은 극단적 상황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일상과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경험하는 감정적 슬픔과 고통 역시 트라우마이며, 이는 세대를 넘어 유전되고 발현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고통을 경험한 세대가 이를 어떻게 수용하는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회와 환경이 치유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에 따라 그 양상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결국 개인이 겪는 감정과 고통은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사회적 문제이자 역사적 문제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 책은 도입부부터 우리가 겪는 슬픔, 분노, 불안, 혼란, 수치심 등 이른바 ‘정신질환’의 징후로 여겨지는 감정들이 사실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자연스러운 ‘경보 시스템’임을 역설한다. 저자는 역사적 맥락과 정신의학적 지식을 교차하며, 정신적 고통을 오직 개인의 생물학적·유전적 결함으로 환원하는 시도를 비판한다. 환경적 요인과 생물학적 요인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는 임계점에서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특히 그 환경적 요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 구조적 부정의, 빈부 격차, 자본주의의 모순, 인종차별, 민주주의 붕괴, 기후변화 등 우리가 마주한 외부 구조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러한 저자의 통찰은 나와 타자,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적 세계관과 맥을 같이하며, 더 나아가 생태학적 관점과도 맞닿아 있다. 이는 곧 개인의 치유를 위해서는 파편화된 사회 구조와 시스템을 복원하고, 공동체적 연대를 바탕으로 한 사회 정의의 실현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연민에 기초한 공동체 회복

나아가 저자는 거대 담론에만 머물지 않고, 개인이 일상에서 고통을 직시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여러 장에 걸쳐 제시한다. 5장에서 8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심리치료 기법을 빌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막고 뇌의 통제권을 되찾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단순히 정신적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넘어, 자기 신체와 감각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마음 챙김 명상의 여러 기법도 상세히 소개한다.

그러나 이 책이 흔한 심리학 서적이나 명상 지침서로 전락하지 않는 결정적 이유는, 앞서 언급한 사회적 문제의식과 함께 개인의 삶을 이끄는 ‘가치(Value)’가 가장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야 함을 제9장(행동의 조절과 변화)에서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신의학 관련 서적들이 주로 개인의 내면을 ‘읽고 해석하는’ 과학적 분석에 치중했다면, 이 책은 그 범주를 확장하여 정신의학이 사회 정의의 실현에 어떻게 복무할 수 있는지를 새롭게 조망한다. 이는 자신과 타인, 나아가 세상을 ‘연민’의 시선으로 끌어안고 치유하려는 저자의 따뜻한 철학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단순한 공감을 넘어, 연민을 동력 삼아 공동체의 회복을 향한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지금, 이 묵직한 저서가 우리에게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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