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그늘, 직업병] Ⅱ. 노동자 위협하는 직업병 <4> 환경성질환
장시간에 걸쳐 축적… 느낄땐 이미 늦어
지난달 31일 경북 포항시 남구 포항건설노조 사무실에서 박주명(48·가명)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 8년을 인생에서 지우고 싶다'는 말부터 했다. 20여년 동안 포항지역 일대 H중공업,H공업 등에서 용접공으로 근무했던 박씨는 지난 1996년 들어 심한 두통,기억력 저하,팔다리 경직 등에 시달렸다. 멍하니 넋놓기 일쑤였고 가만히 있어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친한 동료 이름도 자주 까먹었다. 병명은 망간뇌증. 용접 때 생긴 망간 흄(먼지)이 뇌조직에 축적돼 나타난 증상이었다.
이듬해 3월 노조의 조언을 받아 직업병 산재신청을 했다. 그러나 판정을 4개월쯤 유보하던 근로복지공단이 불승인 결정을 통보했다. '용접작업 경력,혈중망간농도,MRI검사결과 등에 비춰 망간에 노출된 점은 인정되지만 뚜렷한 임상징후가 없다'는 요지였다. 심사청구를 요청했지만 결론엔 변함이 없었다.
결국 민주노총의 지원을 업고 행정소송을 시도했다. 판결은 2000년 1월에 나왔다. 법원은 '망간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고,치료도 필요하다. 공단의 조치는 위법하다'며 박씨 손을 들어줬다. 그제야 공단은 즉각 승인했다.
산재 신청 후 승인받기까지 4년 동안 박씨는 정식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골치 아픈' 노동자여서 고용 기피대상이었기 때문.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형편에 자비 치료는 언감생심. 반면 갈수록 우울증은 심해지고 성격이 난폭해졌다. 발기부전도 동반됐다. '더는 못살겠다'던 부인은 이혼서류를 던지고 박씨 곁을 떠났다.
'어쩌다 이 지경이 돼 버렸는지…. 어차피 죽을 목숨,공단 사무실에 가서 내 얘기 실컷 하고 한풀이나 하고 죽자는 생각도 해봤다.' 지금은 파킨슨증후군까지 보이는 박씨는 '막가는' 심정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비단 박씨뿐이 아니라 작업 중 취급했던 화학물질에 중독돼 고통받는 노동자들은 매년 수십명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금속·유기용제·특정화학물질 중독으로 인정된 업무상 질병자는 110명. 2002년엔 88명이었다. 이 수치는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노동자만 집계된 것이어서 실제 숫자는 훨씬 웃돈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직업병을 통틀어 산업의학계는 '작업장 중독'이라고 부른다. 전형적인 환경성 질환이다.
작업장 중독은 유해화학물질이 코나 입,피부접촉을 통해서 노동자 체내에 쌓여 나타난다. 증상은 기억력 장애,감각이상,호흡기·간·신장·피부 질환 등 다양하다. 종국엔 노동력 상실은 물론,사망까지 이를 수 있어 치명적이다. 동아대병원 김정일 교수는 '특히 독성이 높은 물질은 납·크롬·베릴륨·수은·카드뮴·망간 등을 들 수 있다'고 소개했다.
다른 직업병에 비해 작업장 중독은 법 조문화가 괜찮은 편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보면 염화비닐·타르·수은·크롬·벤젠 등으로 인한 중독 등을 직업병으로 분명히 못박고 있다. 또한 산업안전보건법은 유해물질 취급사업장에선 반드시 특수건강진단과 작업환경측정을 의무화하도록 명문화했다.
그러나 노동계는 중독으로 직업병 인정을 받기는 여전히 힘들고,사전 예방도 구호만 요란했지 노동부가 거의 손을 놓다시피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은 직업병 입증 책임 문제. 현행 시스템은 노동자가 자료를 직접 챙겨 입증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자료 불충분으로 노동자가 불이익을 받을 여지가 많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이은주 사무국장은 '만약 회사가 사용 물질에 관한 정보를 감추면 웬만해선 이를 손에 넣을 방도가 없다. 특히 여러 회사를 다녔던 노동자라면 일일이 모든 사업장의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한계는 최초 진료를 맡은 의사의 판단이다. 산업의학과 의사들이 아닌 경우 대개 병명만 확진할 뿐 직업력과의 연관성을 간과하기 쉽다. 지난해 12월 산재승인을 받았던 장호영(41·가명)씨의 얘기를 들어 보자. '지난해 여름부터 몸이 이상해 한 신경외과를 찾았다. MRI촬영을 했는데 의사가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병원,저 병원을 순례했지만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그러다 주변 소개로 한 대학병원 산업의학과를 방문했더니 망간중독으로 인한 직업병 소견을 들려줬다'.
사업장 중독은 사실상 초기 땐 이를 입증하기가 어렵다. 가령 망간중독만 하더라도 확실한 임상증상,즉 파킨슨증후군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야 한다. 이 정도면 이미 중독이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다. 이 때문에 산업의학계 교수들은 작업환경측정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법적으로 매년 1~2차례 실시되는 작업환경측정을 통해 사업장의 환경 실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독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장치인 셈.
그러나 작업환경측정은 소음,화학물질의 허용 기준치 자체가 느슨해 제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게 노동계의 일관된 목소리다.
우리나라는 현재 미국산업위생학회의 유해물질 폭로기준(ACGIH-TLV)을 채용하고 있지만 이 기준은 한국노동풍토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고신대 병원 김진하 교수는 'ACGIH-TLV는 백인 성인이 1일 8시간,주당 40시간 동안의 허용농도를 정한 잣대로서,일상화된 잔업 등 노동강도가 센 우리 현실엔 부적합하다'면서 '미국산업위생학회가 1994년 발표한 적용 주의사항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산업위생학회는 '작업조건이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는 ACGIH-TLV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회사가 측정기관에 압력을 넣는 일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측정기사는 '측정기관 입장에선 일종의 수익사업이다. 소음 등 측정수치를 적당히 조율하는 일이 적지않다'고 털어놨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정상래 산업안전국장은 '법만 만들어 놓고 할 일 다하고 있다는 식의 노동부 자세부터 바뀌어야 한다. 작업환경측정에서 기준치를 초과했을 때 해당 사업장이 얼마나 개선됐는지를 엄격히 관리,감독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 임태섭기자 tslim@busanilbo.com
◇ 유해인자와 직종별 빈발증상
유해인자들
직종 혹은 산업
직업과 관련한 증상(병원진단시 직업외 다른
원인이 명확히 있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 납
축전지,인쇄,납제련,
케이블제조
빈혈(철결핍성 빈혈제외),소화기장해,지능저하,
정신·신경장해 등
- 수은
계기,형광등 제조,전기분해,
농약제조
구내염,설사,손 떨림,피부염,정신장해 등
- 망간
제강공,용접작업자
기억력 장애,손 떨림,감정의 기복이 적거나
지나치게 느린 동작 등 신경계 증상.
-크롬,니켈,알루미늄
도금,제련
피부점막의 궤양,비중격 천공,단백뇨,기관지 천식,
비염,폐암,신장질환 등
- 산,염기
각종 공업
피부염,궤양,호흡기질환 등
- 금속가공유
각종 공업,기계가공,세척
피부염,모낭염,피부암 등
- 유기용제 및
기타 화학물질
도장작업자,페인트제조,
탈지,세척,도료,용매
빈혈,백혈병,피부질환,호흡장해,간기능저하,
기억력 저하,암 등
- 타르,아스팔트,
피치,파라핀
석탄 및 석유제품 제조
피부염,백반증,피부암,폐암 등
장시간에 걸쳐 축적… 느낄땐 이미 늦어
지난달 31일 경북 포항시 남구 포항건설노조 사무실에서 박주명(48·가명)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 8년을 인생에서 지우고 싶다'는 말부터 했다. 20여년 동안 포항지역 일대 H중공업,H공업 등에서 용접공으로 근무했던 박씨는 지난 1996년 들어 심한 두통,기억력 저하,팔다리 경직 등에 시달렸다. 멍하니 넋놓기 일쑤였고 가만히 있어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친한 동료 이름도 자주 까먹었다. 병명은 망간뇌증. 용접 때 생긴 망간 흄(먼지)이 뇌조직에 축적돼 나타난 증상이었다.
이듬해 3월 노조의 조언을 받아 직업병 산재신청을 했다. 그러나 판정을 4개월쯤 유보하던 근로복지공단이 불승인 결정을 통보했다. '용접작업 경력,혈중망간농도,MRI검사결과 등에 비춰 망간에 노출된 점은 인정되지만 뚜렷한 임상징후가 없다'는 요지였다. 심사청구를 요청했지만 결론엔 변함이 없었다.
결국 민주노총의 지원을 업고 행정소송을 시도했다. 판결은 2000년 1월에 나왔다. 법원은 '망간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고,치료도 필요하다. 공단의 조치는 위법하다'며 박씨 손을 들어줬다. 그제야 공단은 즉각 승인했다.
산재 신청 후 승인받기까지 4년 동안 박씨는 정식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골치 아픈' 노동자여서 고용 기피대상이었기 때문.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형편에 자비 치료는 언감생심. 반면 갈수록 우울증은 심해지고 성격이 난폭해졌다. 발기부전도 동반됐다. '더는 못살겠다'던 부인은 이혼서류를 던지고 박씨 곁을 떠났다.
'어쩌다 이 지경이 돼 버렸는지…. 어차피 죽을 목숨,공단 사무실에 가서 내 얘기 실컷 하고 한풀이나 하고 죽자는 생각도 해봤다.' 지금은 파킨슨증후군까지 보이는 박씨는 '막가는' 심정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비단 박씨뿐이 아니라 작업 중 취급했던 화학물질에 중독돼 고통받는 노동자들은 매년 수십명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금속·유기용제·특정화학물질 중독으로 인정된 업무상 질병자는 110명. 2002년엔 88명이었다. 이 수치는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노동자만 집계된 것이어서 실제 숫자는 훨씬 웃돈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직업병을 통틀어 산업의학계는 '작업장 중독'이라고 부른다. 전형적인 환경성 질환이다.
작업장 중독은 유해화학물질이 코나 입,피부접촉을 통해서 노동자 체내에 쌓여 나타난다. 증상은 기억력 장애,감각이상,호흡기·간·신장·피부 질환 등 다양하다. 종국엔 노동력 상실은 물론,사망까지 이를 수 있어 치명적이다. 동아대병원 김정일 교수는 '특히 독성이 높은 물질은 납·크롬·베릴륨·수은·카드뮴·망간 등을 들 수 있다'고 소개했다.
다른 직업병에 비해 작업장 중독은 법 조문화가 괜찮은 편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보면 염화비닐·타르·수은·크롬·벤젠 등으로 인한 중독 등을 직업병으로 분명히 못박고 있다. 또한 산업안전보건법은 유해물질 취급사업장에선 반드시 특수건강진단과 작업환경측정을 의무화하도록 명문화했다.
그러나 노동계는 중독으로 직업병 인정을 받기는 여전히 힘들고,사전 예방도 구호만 요란했지 노동부가 거의 손을 놓다시피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은 직업병 입증 책임 문제. 현행 시스템은 노동자가 자료를 직접 챙겨 입증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자료 불충분으로 노동자가 불이익을 받을 여지가 많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이은주 사무국장은 '만약 회사가 사용 물질에 관한 정보를 감추면 웬만해선 이를 손에 넣을 방도가 없다. 특히 여러 회사를 다녔던 노동자라면 일일이 모든 사업장의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한계는 최초 진료를 맡은 의사의 판단이다. 산업의학과 의사들이 아닌 경우 대개 병명만 확진할 뿐 직업력과의 연관성을 간과하기 쉽다. 지난해 12월 산재승인을 받았던 장호영(41·가명)씨의 얘기를 들어 보자. '지난해 여름부터 몸이 이상해 한 신경외과를 찾았다. MRI촬영을 했는데 의사가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병원,저 병원을 순례했지만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그러다 주변 소개로 한 대학병원 산업의학과를 방문했더니 망간중독으로 인한 직업병 소견을 들려줬다'.
사업장 중독은 사실상 초기 땐 이를 입증하기가 어렵다. 가령 망간중독만 하더라도 확실한 임상증상,즉 파킨슨증후군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야 한다. 이 정도면 이미 중독이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다. 이 때문에 산업의학계 교수들은 작업환경측정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법적으로 매년 1~2차례 실시되는 작업환경측정을 통해 사업장의 환경 실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독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장치인 셈.
그러나 작업환경측정은 소음,화학물질의 허용 기준치 자체가 느슨해 제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게 노동계의 일관된 목소리다.
우리나라는 현재 미국산업위생학회의 유해물질 폭로기준(ACGIH-TLV)을 채용하고 있지만 이 기준은 한국노동풍토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고신대 병원 김진하 교수는 'ACGIH-TLV는 백인 성인이 1일 8시간,주당 40시간 동안의 허용농도를 정한 잣대로서,일상화된 잔업 등 노동강도가 센 우리 현실엔 부적합하다'면서 '미국산업위생학회가 1994년 발표한 적용 주의사항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산업위생학회는 '작업조건이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는 ACGIH-TLV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회사가 측정기관에 압력을 넣는 일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측정기사는 '측정기관 입장에선 일종의 수익사업이다. 소음 등 측정수치를 적당히 조율하는 일이 적지않다'고 털어놨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정상래 산업안전국장은 '법만 만들어 놓고 할 일 다하고 있다는 식의 노동부 자세부터 바뀌어야 한다. 작업환경측정에서 기준치를 초과했을 때 해당 사업장이 얼마나 개선됐는지를 엄격히 관리,감독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 임태섭기자 tslim@busanilbo.com
◇ 유해인자와 직종별 빈발증상
유해인자들
직종 혹은 산업
직업과 관련한 증상(병원진단시 직업외 다른
원인이 명확히 있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 납
축전지,인쇄,납제련,
케이블제조
빈혈(철결핍성 빈혈제외),소화기장해,지능저하,
정신·신경장해 등
- 수은
계기,형광등 제조,전기분해,
농약제조
구내염,설사,손 떨림,피부염,정신장해 등
- 망간
제강공,용접작업자
기억력 장애,손 떨림,감정의 기복이 적거나
지나치게 느린 동작 등 신경계 증상.
-크롬,니켈,알루미늄
도금,제련
피부점막의 궤양,비중격 천공,단백뇨,기관지 천식,
비염,폐암,신장질환 등
- 산,염기
각종 공업
피부염,궤양,호흡기질환 등
- 금속가공유
각종 공업,기계가공,세척
피부염,모낭염,피부암 등
- 유기용제 및
기타 화학물질
도장작업자,페인트제조,
탈지,세척,도료,용매
빈혈,백혈병,피부질환,호흡장해,간기능저하,
기억력 저하,암 등
- 타르,아스팔트,
피치,파라핀
석탄 및 석유제품 제조
피부염,백반증,피부암,폐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