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아픈 몸 먼저 고칠 제도 마련해야' -기획기사

'아픈 몸 먼저 고칠 제도 마련해야'

본보- 한국노동안전보건부산연구소 산재환자 설문

승인 절차·기간 복잡하고 길어 노동자 속병
회사·근로복지공단 비협조에 '고생' 70%
월급삭감·해고위협 복귀절차도 '가시밭길'

2004/10/06 003면 11:21:13

'일하다 몸 상하면 당연히 직업병으로 인정받아야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질 못해요. 약간 과장하자면 가시밭길이에요. 회사 측에선 회유하다 안되면 겁주죠,요양 승인기관에선 방대한 자료를 요구하다가 '이 검사 해라,저 병원에 들러보라'고 성화지,정신없어요. 그게 끝이 아닙니다. 불승인 결정에 불복하면,이번엔 역학조사한답시고 요란 떤 후 작업현장 대충 둘러보는 걸로 마무리짓죠. 지루하게 직업병 절차를 밟다보면 상처가 도질밖에 없습니다'(A중공업 노동자).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 직업병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직업병으로 인정받고 요양 중인 근골격계질환 노동자 109명의 실제 목소리를 들어봤다.

#직업병 진단·예방 체계에 대해

응답 노동자 82.6%가 '치료 후 산재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대답했다. 직업병 진단 틀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산재승인을 먼저 받은 후 치료비를 지원하고 휴업급여를 주는 방식이다. 반면 '현행 그대로 만족한다'는 의견은 14.7%에 그쳤다.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현미향 사무국장은 '노동계가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선보상 후승인제'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만약 치료 중 불승인 나면 처리를 국가가 책임지면 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직업병 예방장치인 특수건강진단(이하 특수건진)에 대한 노동자의 불신은 깊었다. 요양 전 특수건진에서 근골격계 관련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절반 이상인 50.5%가 '없었다'고 답했다.

특히 특수건진이 직업병 조기발견 또는 조기진단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67.1%가 '별로 혹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특수건진이 당초 취지를 못 살리고 있는 셈이다.

#요양신청 과정에서

부산대병원 강동묵 교수는 '예상했던 대로 노동자는 요양을 결심한 직후부터 수많은 장벽 앞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요양신청 전반에 대한 총평 항목에서 89.7%가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산재신청에서 승인까지의 긴 기간과 절차의 복잡성은 노동자를 괴롭히는 주범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69.8%가 '너무 길다',25.0%가 '비교적 길다'고 의견을 밝혔다. 즉,10명 중 9명이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절차도 마찬가지. 응답자 92.7%가 '너무 혹은 비교적 복잡하다'고 답해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대책이 검토돼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노동자 2명 중 1명(49.1%)은 요양신청 때 회사 상사 등으로부터 모종의 압력을 받았거나 반대에 부닥쳤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복수응답자까지 포함했을 경우 회사 상사의 반대를 경험한 노동자는 응답자의 86.5%를 차지,직업병에 대한 회사 측의 부정적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는 회사 날인을 묻는 항목에서 재확인됐다. 응답자의 31.1%는 날인을 받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또한 68.9%는 날인을 받긴 했지만,그중 42.8%가 그 과정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정상래 산업안전국장은 '단지 소속회사 정보만을 알려주기 위해 마련된 날인 제도가 노동자의 의지를 꺾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요양신청 과정에서 경험한 관계기관의 태도를 묻는 항목에선 의료인과 회사,근로복지공단이 상이한 평가를 받았다. 응답자 69.4%가 병원 또는 의료인이 '협조적'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을 두고는 77.4%가 비협조적이었다고 평했으며,이 중 46.2%는 '매우 비협조적'이었다고 밝혔다. 회사 또한 '비협조적'이라는 응답자가 70.5%에 달했다.

인제대병원 김정원 교수는 '회사나 근로복지공단이 직업병 환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과'라며 '이는 결국 노동자의 심리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치료효과를 경감시켜 종국엔 업무 복귀의지를 떨어뜨릴 소지가 높음을 시사한다'고 해석했다.

#요양과정 그리고 복귀를 앞두고

요양 후 통증은 예전에 비해 나아졌지만,전체적인 치료내용 만족도는 31.3%에 그쳤다. 그 이유는 치료비 자비부담이나 치료항목을 묻는 질문에서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전액 산재보험을 받지 못하고 일부라도 자비를 쓰는 경우가 입원(전체 71명) 땐 25.4%,수술(전체 31명) 땐 71.0%,보조기나 보호구착용(전체 40명) 땐 65.0%로 나타났다.

심층조사에 응답했던 한 노동자는 '가뜩이나 정상월급을 받지 못해 힘든 형편인데 치료비로 야금야금 생활비를 갉아먹으니 집사람과 불화가 끊이질 않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현행 치료항목은 통상적으로 입원,수술,물리치료,약물치료 위주다. 그러나 심리상담치료,직장복귀상담치료,직업재활치료,운동치료 등 노동자의 욕구가 강한 치료는 대부분 행해지지 않았다. 가령 직업재활치료의 경우,응답자 90.6%가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실제로 적용된 것은 14.1%에 불과했다.

심리상담치료도 다를 바 없었다. 응답자 86.4%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답했다.

한국노동안전보건부산연구소 이숙견 사무국장은 '미미한 심리상담치료는 현재 요양 중인 노동자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앓고 있는 점에 비춰볼 때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응답자의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점수를 분류한 결과,75.0%가 위험군에 속했다. 다음으로 저(低)스트레스군 13.0%,고(高)스트레스군 11.0% 순이었다. 정상은 단 1명밖에 없었다. 여기서 위험군은 스트레스가 심각해 의학적 심리평가가 요구되는 사람을,고 스트레스군은 그보다 덜하지만 심리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말한다.

복귀에 따른 고민은 다양했다. '동료들과 서먹서먹해질 것이다'(76.6%) '다시 몸이 아파도 이번처럼 치료받기 곤란할 것 같다'(74.8%) '직장상사 눈치밥이 우려된다'(69.8%) '직장에서 해고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55.7%) 등이 있었다.

더욱이 응답자의 74.8%가' 복귀 후 작업량이나 속도를 조절할 수 없을 것'이며,53.3%가 '직장 작업환경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강동묵 교수는 '복귀했을 때 기존 유해요인이 제거되지 않거나 노동조건과 강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직업병은 재발의 악순환을 피할 길이 없다'며 '노동자 건강을 보장하는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광우·임태섭기자

tslim@busanilbo.com

조사 참여단체=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산재노동자협의회,충청노동건강협의회,광주 민주노총,광주노동보건연대,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양산노동상담소,대구산업보건연구회

후 원=고신대·동아대·부산대·인제대부산백병원

한노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