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 11]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주년 기념 선언문을 발표하며

일터기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주년 기념 선언문을 발표하며

이혜은(소장)

“일상적인 실천과 투쟁을 통해 현장 노동자를 조직하고 주체를 발굴하는” 현장성, “자본의 분열 책동과 회유책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계급적 관점을 견지하는” 계급성, “전문주의와 부문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현시기 노동운동의 전략적 기치를 제기하는” 전문성을 기치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창립된 지 20년이 흘렀다. 이를 기치로 우리는 20년간 노동안전보건운동을 해왔다.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노동자가 주인되는 노동에 대한 우리의 지향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2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한국 사회와 노동자, 한노보연이 달라진 점은 무엇인지 다시 짚어보고, 현시점 우리의 문제의식과 앞으로의 과제를 “20주년 기념 선언문”의 형태로 새롭게 천명하고자 한다. 20주년 기념 선언문 전문과, 이를 통해 담고자 한 문제의식과 향후 과제는 다음과 같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주년 선언문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본주의가 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후와 생태 위기, 극심한 불평등과 민주주의 위기, 다음 세대는 물론 당장 내일의 삶의 전망이 불투명한 재생산 위기. 이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 역시 만신창이가 되고 있습니다. 총체적인 위기에 부딪힌 이 체제를 바꿔내려면 일하는 사람의 단결과 투쟁이 매우 중요하지만, 지난 20년의 위기 속에서 분절된 우리들에게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계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일하는 사람의 존엄과 생명, 평등’이라는 가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이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직종과 업종, 고용 형태와 지역, 국적과 성별 등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일하는 우리들은,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차이를 껴안고 ‘일하는 사람의 존엄과 생명, 평등’을 침해하는 체제를 바꾸기 위해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윤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고 다치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모든 사람이 회원이 되어 함께 활동하자는 ‘열린조직’으로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20년이 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각자의 사업장과 지역,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 임금노동과 무급 노동의 구분을 넘나들며, 일하는 사람의 존엄과 생명을 지켜나가는 전국적 운동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존엄과 생명을 기치로, 불평등과 분절을 넘어설 계기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과 현장에서 사람들이 ‘일하는 과정’에 주목하며, 일하는 사람이 이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 노동자 건강의 기본 조건이고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현장 노동자의 경험과 지식을 대항지식으로 구성해나가는 싸움을 계속할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존엄과 생명, 평등을 위협하는 이 사회 체제를 넘어, 다른 사회운동들과 함께 대안적인 삶과 노동을 구성해 나가겠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젠더화된 노동과 사회에 문제제기하는 노동자 건강권 운동을 전면화할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매개로 기후와 생태 위기에 도전하는 운동을 펼칠 것입니다. 지난 20년간 해 왔던 노동시간과 노동현장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확장하는 싸움을 일하는 사람 모두의 평등을 실현하는 투쟁으로 이어갈 것입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 조건을 쟁취하고, 노동자 스스로 작업장을 통제하여 진정한 노동의 주인으로 설 수 있는 그날까지 쉼 없이 투쟁할 것”이라던 20년 전 창립 선언문의 정신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이어 온 20년의 달리기를, 여러분과 함께 하는 달리기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한국 사회와 노동안전보건운동에 대한 인식
노동안전보건이 이 사회체제의 문제라는 인식은 변함없다. 20년이 흐른 지금, 노동안전보건을 포함하여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본주의가 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20주년 선언문에서는 특히 자본의 착취로 인해 한계에 다다른 생태계, 돌봄과 재생산의 위기,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정당성 위기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짚었다. 한편, 창립선언문도 ‘노동분할’과 ‘노사협조’를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자본의 통제방식은 훨씬 교묘해졌고 노동자 계급 내 분절과 분화는 더 공고해졌다. 이를 바꿔내기 위한 새로운 계기가 필요함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제, 열린 조직으로
이러한 인식 속, 우리는 노동안전보건운동의 과제를 풀어가기 위한 전략으로 ‘열린 조직’을 제시한다. 열린 조직은 운동 전망과 조직 운영이란 두 축으로 제안된 것이다. 운동 전망의 측면에서는 ‘일하는 사람의 존엄과 생명,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계급의 분화/분절로 발생되는 건강불평등, 이윤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고 다치는 세상을 바꾸어 나가자는 것이다. 조직 운영의 측면으로는 노동자의 몸과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을 통해 노동안전보건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넓은 지지자의 조직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어느 때보다도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의 존엄과 생명’이라는 가치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음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현장의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계기를 통해 노동자의 몸과 마음이 지금의 사회체제로 인해 위협받는다는 점에 동의하며 문제제기하고 있는 현재, 이들과 최대한 함께 싸워나가며 현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주체를 만들어 가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보는 계급성, 현장성, 전문성
노동안전보건 문제는 사회체제의 문제이기에 계급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는 한노보연의 지향은 변함이 없다. 다만, 달라진 한국 사회와 노동시장 변화 속에서 노동자 계급은 ‘임금 노동자’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우리의 인식을 더 명확히 밝히고자 했다. 노동자 계급 내의 분절과 분화가 진행되고 현재의 자본주의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에 봉착한 현재,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주체는 각자의 사업장이나 지역, 정체성에 한정되지 않고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 임금 노동과 무급 노동으로 경계 지어지지 않는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천명에는 그동안 연구소가 주로 조직된 노동자를 만나 ‘생산 노동’의 문제에 집중했던 점을 되돌아보고, 앞으로는 더욱 의식적으로 이 시대의 ‘계급’을 새로이 형성하는 과정에 함께 해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창립선언문에서 현장성은 일상적인 실천과 투쟁을 통하여 현장 노동자를 조직하고 주체를 발굴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노동안전보건운동에서 중요한 가치이며, 한노보연이 추구하는 운동의 방법론이자 현재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동력이다. 20주년 선언문에는 이를 이어가며 더 다양한 현장, 더 넓은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며 전국적 운동을 만들어 가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창립선언문에서는 전문주의와 부문주의를 비판하며 전문성을 지향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문성은 그 의도와 달리 노동안전보건 영역에서 전문가로서 역할이나 전문적 지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고, 오용되어 오기도 했다. 20주년 선언문에서는 ‘대항 지식의 형성’으로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이는 현장의 경험이나 저항지식이 사회에서 인정받도록 하는 역할이며, 현장의 일하는 사람이 스스로 일터를 통제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는 지난 20년간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제도화, 안정화되고 이전보다 제도개선 활동의 요구가 높아진 현실에서 노동안전보건 문제의 ‘정치적’ 성격이 약화하고 ‘정책적’ 접근이 강화되는 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역시 작용하였다.

앞으로의 과제
지금까지 기술한 사회 인식과 우리의 지향을 바탕으로, 한노보연 20주년을 맞는 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 번째는 지난 수년간 여성노동건강권팀을 중심으로 의제를 확장하고 활동 성과를 축적해온, 젠더화된 노동과 사회에 문제 제기하는 노동자 건강권 운동이다. 사회적으로도 여성노동 건강 이슈는 주목받고 있고, 그간의 노력으로 연구소의 조직적 기반이 확보되어 연구소의 외연을 확장하는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노동안전보건을 매개로 기후와 생태 위기에 저항하는 운동이다.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일터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함으로써 기후위기 또한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소가 지난 20년간 싸워왔던 근골격계, 노동시간, 정신건강, 작업중지권 등의 매개를 가지고 노동자의 권리를 확장하고자 하는 싸움을, 더 많고 더 다양한 현장에서 이어가겠다는 다짐이다.
한노보연이 출범하면서 선언했던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 조건을 쟁취하고, 노동자 스스로 작업장을 통제하여 진정한 노동의 주인으로 설 수 있는 그날까지 쉼 없이 투쟁할 것”이라는 정신엔 변함이 없다. 20년이 흐른 지금, 이제 더 많은 현장에서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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