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 진료실에서 보내는 편지] 잔혹한 낙관주의를 경계하기

일터기사

잔혹한 낙관주의를 경계하기

김세은(회원, 직업환경의학전문의)

몇 달 전 보건관리대행기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거의 10년 만에 대행 의사로 일해보니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가 나의 시야 밖에 여전히 넓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간 이런저런 업종의 다양한 노동과 건강 문제를 제법(?) 접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한참 오만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몇 달이기도 했다.

여유와 관리가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왕복 3시간의 출퇴근길
며칠 전 어느 물류센터의 외주 업체 휴게실에서 건강상담을 했다. 그날 상담했던 분들 대부분은 최소 40대 후반이었는데, 유독 젊은 노동자 한 명이 있었다. 먼발치에 앉아 삼촌뻘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다 마지막 순서로 상담을 받으러 다가왔다. 그는 30대 초반이었는데, 간이 검사를 해보니 혈당이 다소 높았고 혈압도 고혈압 전 단계에 속하는 수치가 나왔다. 평소보다 오늘 특별히 혈압이 높을 만한 상황은 문진상 확인되지 않았다. 교대근무를 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분은 주간 고정근무만 한다고 했다.
“운동과 식이 관리를 해야 한다.”라고만 하면 막연하게 느낄 수도 있어, 생활 습관을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약간의 의지를 발동하면 실천해 볼 수 있을 만한 것, 어렵지 않게 시작해 볼 수 있을 만한 것을 제시하려는 편이다. 그분께도 그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분은 업무와 출퇴근 외에는 운동을 전혀 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의지가 있어도 하루 30분씩 운동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눈앞에서 영 시큰둥한 표정을 보이는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에 가깝다.
“따로 운동할 시간 내기가 부담스러우시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다고 하셨으니까 한 두 정거장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시는 것도 좋아요. 한두 정거장 걸어가서 타시거나 미리 내리시거나요.”
“집이 좀 멀어서 출퇴근 왕복 3시간 넘거든요. 그렇게 하면 시간이 더 길어져서…”
“아 네…”
그 물류센터는 수십만 명이 일하는 산업단지 내에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1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지역에 살고 있는 그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집에서 1시간 이내로 출퇴근이 가능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정도 있을 것이다. 대규모 일자리가 모여 있는 지역에 가까울수록 주거비는 비싸다. “직장에 좀 더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하시고, 그렇게 해서 생기는 여유시간에 운동하세요.”라고, ‘회사에서 만난 건강상담 의사’인 내가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출근 1시간 반, 퇴근 1시간 반이 걸리는 생활을 상상해본다. 근무 시간에 바쁘게 일하고 지친 몸을 지하철에 태운다. 그리고는 앉아서 한참 꾸벅꾸벅 졸다 눈을 떠도 아직 집까지는 한참 남아있다. 환승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때로는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태로 퇴근해 숨이 찰 정도의 운동을 하려면 얼마만큼의 의지가 필요할까? 퇴근길 편의점이나 마트에 들르면 어떤 것에 손이 갈까?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그렇게 주 5일이나 6일을 출근한다면? 8시간 근무는 가끔만 가능한, 장시간 근무가 일상화된 곳이라면?

작고 얄팍한 해결책
상담을 마치고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던 그 날, 퇴근길에 읽던 책에서 ‘잔혹한 낙관주의’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왔다.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이었다. 사람들의 집중력을 해치는 여러 요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내용이다. ‘잔혹한 낙관주의’가 인용된 장의 제목은 ‘작고 얄팍한 해결책’이다. 사람들의 집중력, 자제력을 꺾으려는 요소들이 조직적으로 도처에 널려있는 환경 속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개인의 의지와 행동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작고 얄팍한’ 해결책이라는 게 그 장의 요지였다. 그런 식의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심각성을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런 대표적인 예로 다이어트를 들었기 때문에 건강상담을 하며 나눈 이야기가 더 생각났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이어트가 끝나도 우리는 여전히 체중 증가를 유발하는 불건강한 환경에 산다. 우리가 만든 이러한 환경에서 체중을 감량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끝없이 아래로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의지에 반하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생하게 와닿는 표현이었다. 물론 저자는 환경이 전부라고 이야기하진 않는다. 다만 개인의 행동 변화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다.

더 나은 선택에 필요한 의지의 문턱을 낮춰 나가자
누구나 자신의 일상을 어떻게 구성할지 선택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무엇을 먹을지, 일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 누워서 쉴지 친구를 만날지 운동을 할지 선택할 수 있다. 신체 건강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개인이 둘러싸인 환경과 여건에 따라, 장기적으로 건강에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는데 필요한 의지의 크기는 다르다. 선택의 범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질 좋은 단백질은 저렴하지 않다. 충분한 채소를 손질하는 데에는 시간과 노동을 투여해야 한다. 또는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노동시간도, 출퇴근 시간도 길어 집에돌아오면 이미 녹초가 되는 사람, 직장 가까이 살며 칼퇴근이 일상인 사람, 일터에서의 퇴근이 곧 제2의 출근(가사와 돌봄)인 사람. 이들이 건강한 식사와 운동을 선택하는데 필요한 의지력의 크기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다. 의지력이 부족한 만큼 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관리가 필요한 분들이 좀 더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시시콜콜 묻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 몇 분 남짓한 시간에 그 사람이 처한 모든 환경을 파악할 수도 없고, 파악한다고 한들 그에 따른 적절한 행동 방안을 척척 내어놓기엔 나의 역량이 부족하다. 하지만 어떤 이의 혈압이나 혈당 수치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이유가 오로지 ‘게으르거나, 관심이 없거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하게 되는 것만은 늘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한 의지가 조금이라도 덜 요구되는 환경으로 바꾸어 가는 것, 즉 노동시간 단축 같은 노동 여건 개선에 관심을 놓지 않아야겠다고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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